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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대학생

일본, 빈곤문제를 무시한다

6월 17일 NHK에 의하면 동경도의 코로나 19 신규 확진자는 16명으로 확진자 누계가 5,633명이 되었다. 사망자 누계는 317명으로 사망률 5.62%이다. 일본 전국 신규 확진자는 46명으로 요코하마항 크루즈선을 포함한 확진자 누계가 18,401명이 되었다. 사망자 누계는 948명으로 사망률 5.15%이다. 같은 날, 한국의 신규 확진자는 43명으로 그중 지역감염이 31명, 해외유입이 12명이다. 확진자 누계는 12,198명이 되었다. 사망자 누계는 279명으로 사망률 2.28%이다.

 

일본에서 코로나 19로 인한 사망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여겨지는 '초과 사망자'에 관한 기사가 나왔다. 코로나 19에 감염해서 '고독사' 형태로 나올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예상을 크게 뛰어넘는 사망자 수와 그에 대한 일본 언론이 무관심을 보면서 너무나 맥이 빠져서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다. 나중에 기운을 좀 차리면 써서 올릴 예정이다. 나도 일본이 엉망진창이 되어 가는 걸 알았지만 이 정도로 엉망진창인 줄 몰랐다.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매일 뉴스를 보고 통계를 정리하면서 관계된 사항을 쫓다 보니 알고 싶지 않았던 부분까지 다 알게 되고 말았다. 그런 부분을 일본에서는 거의 잘 모른다. 내가 말하는 내용이 극단적으로 '왜곡' 한 줄 알 정도다. 특히, 대학생들은 거의 몰라서 일본이 아주 잘 나가는 줄 안다. 눈치가 있는 아이들도 일본이 아주 부유하고 잘 나가지 않아도 아시아에서 가장 부강하고 기술력이 뛰어난 줄 알고 있다. 요즘 들어서 기술력이 어쩌고 하는 식으로 말하는 아이들이 꽤 있다. 유행인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 온라인 강의에 내가 들어가지 못해서 10분 이상 지각했다. 수업 시간 5분전부터 들어가지 못해서 패닉에 빠져서 난리를 치다 보니 다 합하면 20분 가까이 걸려서 겨우 들어갔다. 지난주에도 강의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헤매다가 수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땀을 뻘뻘 흘려서 끈적끈적한 상태로 강의를 했다. 오늘도 20분간 패닉에 빠져서 허둥대고 났더니 강의를 시작도 하기 전에 몇 시간이나 수업을 한 느낌이 들었다. 오전에 수업이 끝나면 배낭을 메고 식료품을 사러 마트에 다녀왔다. 마스크를 쓰면 날씨가 더워도 바깥은 괜찮은데 마트에 들어가면 냉방도 어중간하면 답답해서 땀이 흐르고 숨이 차서 정신이 몽롱해지는 느낌이 든다. 냉방이 강하고 마트에 사람이 적으면 괜찮다. 오늘 가끔 마트에서 봤더니 다른 사람과 간격도 신경을 쓰지 않는 남성들이 꽤 있어서 신경이 쓰였다. 계산대 앞에 줄 선 사람도 마찬가지다. 확실히 느슨해졌다.

 

주위에 있는 보육원부터 초.중.고까지 학교를 재개해서 학생들이 보인다. 마스크를 쓴 아이들도 있지만 마스크를 쓰지 않고 모여서 노는 아이들도 많다. 나도 어제저녁에 산책을 할 때는 사람이 없는 공원이라서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주변에는 워낙 인적이 드물어서 다른 사람과 마주치지 않는 곳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가끔 다른 사람과 멀리 떨어져서 지나칠 때는 스카프로 가린다. 다른 사람에게 불안을 조성하지 않으려는 차원에서 하는 행동이다. 오늘은 집에 있으면 습도가 낮고 시원하고 쾌적한 날씨인데, 낮과 오후에 마트에 가느라고 나갔더니 지면이 열을 받아 뜨거워져 있어 그늘이 없으면 아주 더워서 몸이 흐물흐물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가끔 강의에서 같은 주제로 전 학생에게 말해서 학생들의 반응을 측정할 때가 있다. 아주 간단한 조사도 된다. 지지난주에 내 강의를 듣는 학생에게 미국에서 인종차별 반대 데모를 하고 있다. 백인 경찰이 흑인을 단속하면서 죽인 사건에서 시작된 것으로 세계적인 사건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시부야에서 경찰이 외국인을 단속하면서 폭행을 해서 외국인이 다쳤다. 그에 대해 외국인들이 항의 데모를 했다는 걸 말했다. 그랬더니 정말로 약속이나 한 듯이 그런 말을 듣지 않았다는 식으로 완전히 무시하는 반응이었다. 노동사회학 수강생 중 딱 두 명이 반응을 보였다. 오늘까지 그에 대해 피드백을 했다. 일본에서는 이런 식의 대응을 한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본의 문제에 대해서는 싹 무시한다. 문제가 없는 것처럼,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이야 말로 문제인 것처럼 몰아간다. 그러면 그 문제는 어떻게 될까? 문제가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런 대응으로 지켜지는 것은 가해자이며, 권력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거의 습관적으로 그런 태도를 취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자신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가장 비판적이다. 자신들이 사는 사회와 나라가 좋아지길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사는 사회의 문제점을 가장 잘 알고 고칠 수 있는 입장이기도 하다. 우선, 자신이 사는 곳을 좋게 하면 그런게 모여서 전체적으로 보다 나은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닐까? 일본은 이중잣대로 다른 나라와는 반대로 자신들에게는 그렇게 관대하면서 주변 국가에 대해서는 아주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다는 걸 모른다.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자신들과 관계가 없다고 비판을 한다. 왜 자신들의 사회에 대해 같은 시선으로 보지 않을까? 우선은 일본 사회가 어떻게 되는지가 중요하지 않을까. 

 

오늘 강의를 시작하면서 최근 북한의 동향이랄까, 어제 있었던 남북 공동 연락 사무소 폭파에 대해서 해설을 듣고 싶다면 준비했으니까, 나중에 질문 시간에라도 듣고 싶다는 의사표시를 하라고 했다. 거기에 대답을 들었는데, 결국, 마지막까지 한 명도 그 해설을 듣고 싶다는 학생이 없었다. 오늘 강의는 수강생이 230명인데, 강의에 들어온 숫자를 보면 최대 110명 정도였다. 나는 학생들이 알고 싶을 것이라고 봤는데, 관심이 없었나? 거의 항상 이런 식이다. 학생들을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 많은데 학생들은 알고 싶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말을 하기가 어려우면 메모를 남기라고 해도 반응이 없었다. 그러면 괜히 화가 난다. 의욕이 낮은 학생에게도 그렇지만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실망하는 자신에게도 화가 난다. 관련 과목을 듣는 데도 정말로 학생들 의욕이 낮다. 

 

지난주에 끝나지 않았던 '상대적 빈곤'에 대해서 질질 끌었다. 우선, '빈곤'은 해결해야 하는 '정치적인 문제'로 본다. '절대적 빈곤'은 간단하고 알기가 쉽다. 대처도 경제적 지원을 하면 되니까 간단하다. '절대적 빈곤'이 '양적'인 문제라면 '상대적 빈곤'은 '질적'인 문제라서 기준이 있지만 그 것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관계의 빈곤'이라고 해서 사회적 자원에 어프로치를 할 수가 없어서 기회를 잡지 못한다. 거기에는 심리적인 위축으로 인해 의욕이 낮은 점 등이 있다. 능력을 개발하려고 해도 처음부터 포기하고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일종의 '빈곤의 문화' 같은 것이 있다. 일본의 '빈곤' 중에서 '어린이 빈곤'을 가장 심각하게 본다. '빈곤'은 세대 간에 '대물림'을 한다. '빈곤'의 '대물림'을 방지하려면 '상대적 빈곤'에 섬세한 지원이 필요하다. 질문했던 학생이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헷갈린다. 일반적인 정의와 강의에서 다루는 정의가 다르냐고 한다. 일반 정의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해도 같은 말이 반복된다. 학생은 딱 떨어지는 정의라는 답을 듣고 싶은 모양이다. 참고 문헌이나, 논문을 알려달라고 한다. 참고 문헌을 알려 줬지만, 거기에 내가 설명하는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 보면 '빈곤'문제를 무시하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보통 사람들은 '빈곤'까지 가지 않아도 코로나 19 사태를 맞아 생활이 힘들어지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걸 알고 걱정한다. 결국,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 정부에서 빨리 대책을 마련하고 실시해서 힘들어지는 사람을 구하는 것이 전체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정부나 지자체가 빠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실망하거나 화를 내기도 한다.

 

일본 정부에서는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원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소비세를 인상했다. 특히, '어린이 빈곤율'이 상승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위기 의식을 느꼈기 때문에 소비세가 거기에 쓰인다면 납득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세금을 내야 한다면 내지만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가 중요하다. 그런데, 실제로 '어린이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쓰인 것은 아주 적고 대부분은 다른 곳에 쓰였다. 그 결과, '어린이 빈곤율'이 조금 나아졌지만 소비세 인상 이전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어린이 빈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 아프게 생각하지만, 일본 정부에서는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민의가 반영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을 좌절하게 만드는 정치를 하고 있다. '빈곤'을 무시하면 안 된다. 조금이라도 일찍 '빈곤'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어린이 빈곤'은 '빈곤의 대물림'을 받은 아이들이다. 아이에게는 죄가 없다. '빈곤' 문제를 무시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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