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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생활

밭 모퉁이 벚꽃나무

오늘 동경은 최고기온이 30도를 밑돌아서 더운 날씨가 아니다. 그런데, 습도가 80%를 넘으니 땀이 줄줄 흐른다. 머리가 좀 자라서 날씨가 덥고 습도가 높으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더워진다. 머리에 털모자를 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주말에 집에서 머리를 자르고 싶었지만, 참았다가 오늘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머리를 자르러 갔다. 역 근처에 있는 가게는  퇴근시간이 되기 전이라, 기다리는 사람이 적었다. 2년 정도 안 간 사이에 요금이 살짝 올랐다. 요금이 올라도 이상한 사람에게 걸리지 않고 너무 이상하지 않게 머리를 자를 수 있으면 된다. 오늘 내 머리를 자른 담당자는 여성이었다. 내가 본 인상으로는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줄 알고 봤더니, 한 살 차이다. 그런데, 너무 다르다. 나는 나이가 비슷한 사람은 대충 비슷한 줄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다를 줄 몰랐다. 괜히 내가 미안할 정도로 나이 먹은 모습이었다. 

 

길이를 얼마나 자르냐고 해서 옆은 6미리로 해달라고 했다. 너무 짧아서 남자가 된다고 한다. 뒤에서 보면 남자로 보여도 앞에서 보면 여자니까 괜찮다고 했다. 안된다고 해서 머리가 숫이 많아서 너무 더워 땀이 줄줄 흐른다고 했더니, 머리를 짧게 자르면 땀이 더 많이 난단다. 일본에서는 손님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지 않는 걸 좋은 서비스로 아는 모양이다. 특히, 미장원의 경우가 그렇다. 내 주장을 했다가, 미용사가 어떤 심술을 부릴지 몰라, 자르고 싶은 대로 자르라고 했다. 그러더니, 결국, 머리를 잘라보고 더 자르고 해서 결국은 내가 말한 6미리까지 갔다. 짧게 자르니 깔끔하고 인물도 훨씬 살아난다. 마지막에 미용사가 하는 말이 한꺼번에 자르면 되돌릴 수 없으니까, 조금씩 했는데 결국 손님이 말한 대로 한 게 좋다고 했다. 머리를 짧게 자르니까, 훨씬 얼굴도 밝고 머리통도 예뻐서 잘 어울린다고 한다. 나도 다행이다 싶어서 고맙다고 했다. 미용사가 좋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보통은 자기 고집대로 잘라 놓는다. 그래서 모르는 미장원에 가는 것이 무섭다. 돈 주고 신경 쓰고, 시간을 쓰고 기분이 나빠져서 오기 때문이다. 머리가 가벼워지니 너무 기분이 좋다. 무게로는 얼마 되지도 않는 머리를 자른 것만으로 기분은 아주 산뜻해진다. 

 

나는 그냥 보면 외국인, 한국인인 줄 모른다. 머리를 자르면서 한참 말을 하다가, 혹시 일본 사람이 아니냐고 해서 한국인이라고 했다. 한국인이라고 하면서도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 태도가 급변하면 어떡하지, 약간 쫄았다. 일본에서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난데없이 손가락질을 받고 욕을 먹기도 한다. 머리를 자르는 도중인데, 분위기가 이상해질까 봐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도 자기 딸이 한국화장품을 쓴다면서 한국사람들은 피부가 예쁘다고 말을 이어간다. 휴, 다행이다.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서. 이렇게 일본에서는 한국인이라는 걸 알면 봉변을 당할까 봐, 조마조마하면서 산다. 머리를 자르는 것만으로 스릴가 서스펜스가 넘치는 드라마를 체험할 수 있다. 솔직히, 일본 사람들 무섭다. 

 

조금 전에 일기예보를 확인했다. 내일은 맑고 기온도 높지는 않다. 그러나, 요즘 날씨는 기온보다 습도가 문제다. 장마에 들어섰는지 궁금해서 봤더니 아직 장마에 들어서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지역별로 해마다 언제부터 장마철에 들어서고 장마가 끝나는지가 중요한 관심사가 될 정도로 비가 많이 길게 온다. 5월 하순에 갑자기 기온이 34도까지 올라가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서 예년에 비해 더위가 빨리 올 줄 알았다. 주변에 수국이 핀 것을 보면 예년보다 좀 늦은 감이 있을 정도다. 비가 오지 않아서 수국이 피기 시작했는데 힘이 없다. 수국은 물을 많이 먹는 식물이라, 비가 와야 한다. 작년에 내가 관리하는 수국을 첫 번째로 핀 꽃을 누군가에게 뺏겨서 올해는 일찌감치 꺾어 와서 화병에 꽂았다. 옆에는 제라늄도 두 송이 있다.

오늘은 학교에서 오면 접시꽃을 찍으러 갈 예정이었는데, 머리를 자르느라고 못 갔다. 내일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접시꽃이 핀 곳을 거치면서 사진을 찍어야지. 거의 해마다 때가 되면 사진을 찍는 것 같은데, 접시꽃이 피는 곳도 표정이 달라진다. 주변을 보면 거목을 사정없이 한꺼번에 열 그루 이상을 베어내서 주변 풍경이 변한다. 달라진다는 게 좋은 쪽이 아닌 것이 유감스럽지만, 내 소유가 아니니 어쩔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나무를 많이 잘라낸다. 거목이 잘려 나가면 그자리에 커다란 나무가 있었던 풍경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쓸쓸한 기분이 된다. 올봄에 주변에 거목이 몇 그루 잘렸다. 나무가 잘린 밑동을 보면 나무가 병이 들어서 잘랐는지 아니면 그냥 관리하기가 힘들어서 잘랐는지 알 수 있다. 병이 든 것은 어쩔 수가 없지만, 관리하기 귀찮아서 잘라낸 경우는 아쉬운 기분이 든다. 

 

근래 주변에서 잘린 나무 중에는 열매가 열리는 나무가 많다. 감나무와 오디나 무도 몇 그루 있다. 지금 오디 철이다. 강가에 있었던 오디나무는 열매가 크고 맛있었다. 올해는 잘려나가서 없어졌다. 전에는 공원 주차장에도 오디나무가 있어서 계절이 되면 오디가 많이 떨어져 있어 줏었다. 강가의 오디나무는 완전히 잘렸다. 도서관을 쓰는 대학에 가기 직전에 밭이 있는데, 그 밭 귀퉁이에 있는 오디나무는 가지치기를 사정없이 해서 올해는 아예 오디가 열린 것을 볼 수가 없다. 오디나무 열매가 떨어지는 것이 귀찮은 모양이다. 주변에 오디나무가 있는 걸 보면 예전에는 오디를 간식으로 먹었다는 걸 알 수가 있다. 이제는 오디를 따먹거나 하는 사람이 적은 모양이다. 지금 오디가 떨어지고 있어서 오디나무가 잘린 강가를 지날 때 생각이 난다.

 

올봄에 잘린 나무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나무는 벚꽃나무 두 그루다. 내가 좋아하는 일본의 풍경 중에 하나가 농가 마당에 오래된 거목의 벚꽃나무가 있다거나, 작은 밭 구석에 큰 벚꽃나무가 있어 주변을 환히 밝히고 나뭇그늘에 멋있는 풍경은 만드는 것이다. 벚꽃나무가 잘리는 날, 그 옆을 지나가면서도 나무가 잘릴 줄 몰랐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까, 이상한 느낌이 들 정도로 주변 풍경이 변해 있었다. 너무 이상해서 봤더니 벚꽃나무가 잘려 나갔다. 마음이 아파서 한동안 나무가 잘려 나간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무가 병이 들어서가 아니라, 관리가 귀찮아서 자른 것 같다. 큰 벚꽃나무 두 그루가 없어지니 주변 풍경이 달라졌다. 삭막해졌다. 여름에는 나무 그늘이 없어져서 가까운 학생들 자전거를 세우는 곳에서 일하는 아저씨들도 더 더워지겠다. 올해 벚꽃이 피였을 때 사진을 찍은 것이 있는데 올리질 못했다. 흐린 날 찍어서 예쁘게 찍히지 않은 것도 괜히 미안하다. 이제는 6월이 되어 여름을 향해 가니, 사진을 올리자.

 

더 이상 볼 수 없는 벚꽃나무가 마지막으로 벚꽃을 피운 사진이다. 고마웠다. 벚꽃나무가 있어서 그 주변이 특별했는데, 없어지니 그냥 볼품없는 풍경이 되고 말았다. 도서관에 갈 때 항상 지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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