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30 한국 유학생 A, B, C
동경도 요새는 살인적인 더위가 계속되고 있나 보다.
나는 집안에서 창밖을 보며 느끼는 거라 살인적인 더위라는 게 실감이 안 난다. 내가 사는 곳은 다행히도 도심에서 벗어난 교외다. 주택도 한적해서 덜 덥다. 그래도 아직 열대야가 아니라서 지내기가 수월하다.
종강을 하는 날,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과일을 왕창 사 왔다. 학생들 리포트에 감상문으로 이미 짐은 무거웠지만, 미친 듯이 끝낸 학기말이라 혼자서라도 뒤풀이를 해야 한다. 그 게 비록 배 터지게 과일을 먹는 것이라고 해도… 참고로 나는 학기말을 조용히 평화스럽게 끝낸 적이 없다. 다양한 이유로 미친 듯이 학기를 끝내는 사람이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나, 단지 나 같은 사람에게 걸린 게 죄지, 그러나 반쯤은 학생들에게도 책임은 있다.
종강을 하는 날, 슈퍼에 들렀더니 큰 수박이 쌌다. 사야지, 복숭아도 상자째로 한 상자를 샀다. 아주 큰 걸로 한 상자를 샀더니 9개들이였다. 이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거운데 다른 것들도 사서 팔이 빠지고 두 손이 저리도록 들고 왔다.
우선, 복숭아부터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몸/땀냄새가 복숭아 과즙 냄새로 변해간다. 이튿날부터 수박을 먹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먹는 수박이라 큰 수박을 잘라서 4등분을 한꺼번에 먹었더니 갑자기 위가 확장되며, 아파온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 자신의 무모함을 비웃는다. 참으로 무식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위를 늘려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아침에 일어나서 항상 하는 요가도 안 한다. 시간이 있어도 저녁에 하는 산책도 안 한다. 이틀 동안은 흐느적거리며, 폐인이 된 것처럼, 수박과 복숭아 귀신에 홀린 것처럼 먹어대고 눈이 아롱거릴 정도로 재미없는 영화를 보고 있다. 몸에서도 복숭아 냄새와 수박 냄새가 난다. 폐인 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이대로 방학을 보내면 푹 썩고 삭아서 제대로 된 폐인이 완성될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없다. 아직 채점도 안 끝났고, 성적 입력, 원고 교정, 새로운 프로젝트 계획서, 다음 학기 준비 등… 일을 생각하면 끝이 없다.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젯밤 공원에 잠깐 나갔더니, 치자꽃이 다 졌다. 치자꽃이 피는 계절이 끝났나 보다. 공원에 가는 재미가 줄어들었다.
내 수업을 듣던 한국 유학생이 세 명 있었다. 다른 수업에도 유학생들이 있지만, 유학생이라고 해서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는다.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여긴다. 첫 번째 시간이 끝나서 감상문을 써낸걸 보니, 일본어를 아주 못한다. 기초가 턱없이 부족하다. 이 정도로 일본어를 못하는 유학생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감상문을 읽으니 평균 수준에 못 미친다. 그냥 두면 학기말에 떨어질게 뻔하게 보인다. 그래서 주의를 줬다. 강의를 들으면서, 모르는 말은 사전을 찾도록, 한자를 검색할 때, 휴대폰을 쓰지 말고 일본어 사전을 쓸 것, 그것도 한일사전이 아닌 일일사전을 쓰도록. 전자사전을 써서 일본어 공부를 하는 방법을 시범으로 보여줬다. 그리고 일본어 책을 읽도록 어드바이스를 했다. 그 걸 들은 일본 학생이 내가 유학생에게 특별히 엄하게, 차별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 건 아니다. 일본어를 못한다는 것은 강의를 따라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 학생들이 하는 것처럼 필요한 한자를 휴대폰에서 확인하는 것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다음 시간부터 유학생 A가 쓰는 감상문이 달라졌다. 좋게 달라진 것을 수업시간에 알려준다. 아마 이 유학생은 내가 무섭다거나, 아니면 내가 어드바이스를 한 게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 후로도 계속 괜찮은 레벨로 감상문을 쓴다. 그 학생은 적어도 나를 조금 신뢰했고, 마음을 열었다. 학생이 재빨리 판단을 한 것이다. 이 사람은 무서우니까, 어드바이스를 듣는 게 좋겠다. 아니면 자기를 위해서 말해준 거니까, 들어야지. 자신의 노력을 평가해주니, 열심히 해야지 등… 어쨌든 수업을 같이 운영해 나가면서 나와 감상문을 통해서 대화를 계속해 간다.
유학생 B는 일본어 능력도 달라지지 않고 지지부진하다. 그렇다고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중반부터 감상문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글씨가 너무 악필에다 글을 쓰는 것도 줄을 안 맞추어서 쓴다. 그것도 수업시간에 말했더니 글씨도 조심해서 쓰고 줄도 맞춰서 쓴다. 줄을 맞추어서 쓴 것은 그때 한 번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글씨는 조심해서 써서 내가 읽을 수 있다. 중반 이후는 계속 괜찮은 감상문을 쓴다.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평균 수준에 미친다.
유학생 C는 마지막까지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일본어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는 것 같지도 않고, 수업을 잘 듣는지도 모르겠고 반응이 없다. 내가 보기에는 마지막까지 뺀질뺀질 피하는 것 같았다. 나를 피할 수는 있어도 자신을 피할 수는 없을 텐데… 나는 어드바이스를 하면 그 게 어떻게 받아들이고 변해가는지 지켜본다. 그리고, 그 결과를 알려주고, 다음에 뭘 해야 할지 알려준다.
유학생 C가 마지막 주, 토론시간이 끝난 후 감상문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오늘 수업을 듣고 자신이 장래에 뭘 하고 싶은지 확실히 알았습니다. 이 수업은 저에게 중요한 수업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이 수업에서 처음부터 잘 못했지만, 선생님 덕택에 인간적으로 많은 것을 느꼈고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상문 내용은 그동안 학생과 내가 교환했던 것들이 없으면, 별다른 내용이 아니다. 그래도 나는 이 감상문을 통해서 학생이 뭔가 달라진걸 알았다. 눈을 떴다거나, 정신을 차렸다거나…
리포트를 받는 시간에 내가 이 수업에 많은 기대를 했는데, 좋은 성과를 못 내서 반성하는 의미에서 머리를 잘랐다고 했더니, 유학생 C가 말귀를 알아듣고 어쩔 줄을 모른다.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와서 나에게 사과를 한다. 잘못했다고.
유학생 A에게 감상문을 자신이라는 개인과 사회, 세계를 연결시켜야 한다고 어드바이스를 했다. 유학생 B에게, 일본어 공부를 내가 어드바이스 한 것처럼 안 했지? 성과가 안보였거든. 그리고 감상문은 자신과의 관계를 명확히 쓰라고, 그러면 좋은 감상문이 된다고 했다. B가 반론을 한다. 일본어 공부는 안 했지만, 이 과목은 열심히 했다고… 이 게 말이 안 된다. 사회과학은 언어가 중요하다.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할 정도의 언어능력은 꼭 필요하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대학에 와서 자기 학생도 아닌데, 학생의 개인 특성을 파악해서 공부하는 방법을 어드바이스 하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까, 알려주면 듣기라도 하라고.”
유학생 C에게, 너는 마지막까지 말을 안 듣더라고, 화가 났다고 했다. 너희들 세 명은 그냥 두면 떨어질게 뻔해서 어드바이스를 한 거고, 지켜본 거라고, 행여 내가 한국사람이라, 한국 유학생에게 특별한 관심이나, 장난으로 한 게 아니라고. 유학생 C는 나를 ‘신뢰’ 하지 못했고, 내가 그러는 걸 아마 한국 선생이라서, 한국 유학생들에게 특별히 엄하게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유학생 C는 계속 사과를 한다. 잘못했다고, 잘못했다고, 나중에는 거의 울 것 같다. 내가 학생을, 남학생을 울릴 수는 없어서, 거기서 뭘 잘못한 거냐고 묻지 않았다.
“그래, 어떻게 살든, 너의 인생이야. 그리고, 너는 일본 학생이 아니거든, 유학생이야. 돈들이고 시간 들여서 그 게 아깝지 않니?, 그래도 뭔가는 해야지. 나도 유학생이었던 시간이 있어서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남아있었던 여학생들과 말을 몇 마디 나누고 교실을 나왔다.
그날 밤, 오랜만에 잠을 설쳤다.
과연, 학생들에게, 유학생 A, B, C에게 내가 뭔가를 던지기는 했다는 건가. 특히 유학생 C에게 ‘자신의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전하기는 했는지, 의문이다.
반성하는 의미에서 자학적으로 수박이나 복숭아를 폭식하며 폐인처럼 이틀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