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31 위안부 문제 합의와 이행의 ‘강제성’
오늘 동경은 비가 오다가 개이다가, 다시 비가 오다가 맑게 개인 아주 이상한 날씨다. 주말에도 계속 비가 왔다. 올여름은 비가 많이 와서 집에서 버섯이 나올 것 같다.
오늘은 월요일 도서관에 신간이 입하하는 날이라 도서관에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침에 너무 비가 많이 와서 밖에 나갈 엄두를 못 냈다. 아침을 먹고 좀 있으니까 비가 그쳐서 밖에 나가기로 했다. 집에만 있으니까, 너무 답답해서 바깥에 나가려니 다시 비가 와서 우산을 쓰고 나갔다. 우산을 쓰고 10분 정도 걸었더니 비가 그쳤다. 햇살이 강해졌다. 우산으로 쓰던 것이 양산이 되었다. 그런 걸 30분 사이에 반복 재생하는 것이었다. 길을 걷는데, 바람이 뜨겁다가 차갑다가를 반복한다. 내가 살짝 맛이 간 것인가? 하는 기분이 될 정도로 요상한 날씨였다. 비가 오다가 햇볕이 나기를 반복하니 길도 젖었다가 마르기를 거듭한다. 그 것도 아주 짧은 시간에 반복되는 걸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사우나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아니고, 이상한 날씨다. 버스정류장에 선 할머니에게 물어봤다. 오늘 날씨가 어떠냐고? 태풍은 지나갔냐고? 내가 느낀 것과 같이 이상한 날씨란다. 태풍이 오느라고 그런 것이 아니냐는 말씀이었다. 그렇다, 오늘 밤에 큰 태풍이 온단다. 태풍이 크다고 지난 주부터 화제가 되어 있다. 태풍이 크지 않아도 비가 많이 와서 큰 비가 내리면 위험하다. 개인 날이 일주일에 이틀 정도였나 싶을 정도로 비가 많이 왔다(여기까지 이틀 전에 씀)
어제는 태풍이 올 줄 알고 기다리면서 지냈다. 다행히도 태풍은 동경을 비켜서 동북지방을 지나갔다. 오늘은 정말로 오랜만에 상쾌하게 맑은 날이라, 아침에 빨래를 해서 말렸다. 빨래가 바싹하게 잘 말랐다. 태풍이 지나갔다는데, 강한 바람이 분다.
8월이 가기 전에 써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쓰지 않아도 누군가 쓰겠지 싶어서 관련된 신문기사를 읽었지만, 나와 같은 관점이 없었다.
8월은 전쟁과 관련해 일본에게 특별한 달이다. 8월로 위안부문제를 최종적으로 종결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90년대 초반에 위안부 증언이 나온 이후 올해로 25년이 넘는 것 같다. 동경에서 처음 위안부문제를 들었을 때,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전쟁 때라도, 인간이 해서는 안될 짐승만도 못한 짓인 것 같았다. 너무 충격적이고 잔혹해서 믿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 위안부가 여자인 입장에서 그런 경험을 했다고 해도 어떻게 자신의 치욕스러운 경험을 밝힐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 후 꽤 오랫동안 의식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피했다. 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이런 입장은 나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렇지 않았나 본다. 그런 방관자의 의식을 새롭게 한 것은 전적으로 위안부 당사자를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이었다.
위안부가 자신들의 치욕스러운 경험을 증언하는 것은 ‘용기’있는 고발이며 다시는 자신들과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길 바라는 ‘희망’을 향한 ‘희생’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위안부문제가 알려진 것은 내가 일본에 살기 시작한 이후여서 한국에서 운동을 전개한 상황을 자세히 모른다. 일본에서도 재일동포나 다른 여성학, 역사학자들의 연구가 있었지만, 옆 눈으로 보는 정도로 논문이나, 책을 챙겨서 읽었다. 내 주변에 있는 다른 외국인 친구가 서울에 가면 수요집회에 참가하고, 수요집회가 열리는 가까이에 머물면서 자신이 참가를 못해도 지켜보는 걸 들었다. 정작, 위안부에 가까운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운동의 국제적인 전개를 들으면서, 국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연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나처럼 위안부문제에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사고가 정지된 사람은 나만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그런 말을 들은 한국인 여성학자도 외국인들의 관심과 반응에 놀랐으니까. 이런 것에는 내가 한국인 여성이라는 것과 일본에 살고 있다는 있어서, 양국의 상반된 분위기에 휩싸였다는 것도 영향이 있다. 지금까지 나와 위안부문제의 거리에 대해 구구절절 변명을 썼다.
위안부문제에 관해 거리가 좁혀진 것은 작년 말 일본 정부와 행해진 ‘합의’에 대한 분노였다. 위안부문제와 더불어, 위안부문제의 상징인 ‘소녀상’마저 말살하려는 의도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본에서 위안부에 관한 매스컴의 보도는 주로 ‘돈’을 노린 것이라는 걸 강조해 왔다. 나도 오랫동안 위안부에 관한 일본의 보도를 읽으면서 처음에는 그럴까 싶었다. 그러나, 같은 여자로서 ‘돈’만을 위해서 자신이 당한 치욕을 만천하에 공개할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시민운동이 국내외적으로 장기에 걸쳐 전개될 때 무엇보다도 ‘당사자’의 증언이 열쇠가 된다. 단지, ‘돈’만을 위해 자신들의 ‘치부’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운동에 동조하거나, 협력하겠나? 있을 수 없다. 이번에 생각했더니, 위안부는 50대 중반인 나에게 ‘어머니’세대였다. 그야말로 자신들을 던져 용기 있는 고발을 한 용감한 '어머니'인 것이다.
작년 말에 기습적으로 한 ‘위안부 합의’에 관해 일본측의 입장에 대해 생각해 봤다. 90년대부터 위안부문제는 일본에서 보기에는 아주 껄끄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위안부에 대한 연구 등으로 자신들의 과거에 행한 일에 대해서 피해자인 당사자들이 일어난 이상 없던 일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일본정부가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고 우겨도 위안부가 일본군에게 성적으로 유린당한 피해자인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일본의 우경화가 심화하면서, 특히 자신들의 역사를 수정하는 아베 정권은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면서도 자신들 역사의 ‘치부’라고 여겼다. 어쨌든 종결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종결해야 할 과제인 것이지, 애초부터 피해자에게 진정한 사죄로 문제를 풀 의도가 없었다고 본다. 그래서, 위안부나 한국정부도 예상치 못했던 기습적인 ‘합의’를 본 것이다. 결국, 일본정부는 당사자에 대한 진정한 사죄도 한국인들과의 ‘화해’를 향한 것도 아니어서 한국인에게 새로운 ‘분노’를 유발했다. ‘돈’을 내놓으면서도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한 배상금이 아닌 치유 금이라고 했다. 자신들은 잘못한 것이 없지만, 시끄러우니까, 돈을 내서 입을 막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잘못하지 않았다면 왜 돈을 내놓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식 문제 해결 방법인 것이다.
위안부들이 요구한 것은 ‘돈’이 아니었다. 진정한 사죄와 명예회복, 인간으로서 존엄성의 회복이다. 자신들의 치욕스러운 과거를 밝히는 ‘용기’로 인류에게 다시는 자신들이 당한 ‘폭력’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희망’을 위해 ‘희생’한 위안부에게, 일본 정부는 다시 한번 ‘돈’으로 후려치는 ‘굴욕’을 안겨줬다. 위안부에게 ‘돈’이라는 무기를 써서 입을 틀어막는 ‘폭력’을 행하고 있다. 일본 정부에게 하청을 받아 위안부에게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하는 것은 한국 정부가 되겠다. 그런 의미에서 당사자의 의사를 무시한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가 ‘합의’했다는 것은 ‘공범적인 관계’다. 위안부 문제를 여기서 돈을 받고 끝낸다는 것은 '치욕'의 대물림이며 '희망'을 쳐부수는 일이 된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합의’에 의해 위안부 생존자와 사망자 가족에게 돈을 주는 걸로 위안부 문제를 ‘불가역적’으로 종결한다는 것은 ‘강제적’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일본 정부는 전쟁 때, 위안부를 ‘강제연행’ 하지 않았다고, 정부가 직접적으로 관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일관된 주장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종결시킨다는 ‘합의’에서 합의한 내용을 실행하는 일련의 과정이 ‘강제적’이지 않는가? 전쟁 때, 위안부의 ‘강제연행’은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은 전쟁도, 식민지 지배 하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운동을 전개해온 당사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켜 ‘폭력적’으로 입을 다물게 하면서 자신들의 과거에 행한 일련의 일들이 스스로가 ‘강제적’이었음을 증명해줬다.
'일본사회 > 위안부 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안부'의 해를 보내며 (0) | 2019.12.27 |
---|---|
소녀상을 잊지 마세요 (0) | 2019.12.27 |
‘최악’의 위안부 합의 (0) | 2019.12.27 |
위안부 소녀상을 지켜주세요 (0) | 2019.12.27 |
오리무중 ‘위안부’ 문제 (0) | 2019.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