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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지워진 흔적들

2015/10/11 지워진 흔적들

 

오늘 동경은 아침부터 촉촉이 가랑비가 내렸다. 저녁이 되어 잠깐 햇살이 비췄지만, 하루 종일 날씨가 흐렸다. 날씨가 흐리지만 무겁게 흐린 것이 아닌 촉촉하다고 할까, 가을이 깊어가는 차분한 날씨였다. 내일은 날씨가 맑다니까, 내일 아침에 청소를 하고 도서관에 가야지

서울에 갔던 이야기다. 합정역 부근에 약속이 있던 날,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갔다. 옛날, 30년 전 이상 동경에 오기 전,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서울에서 살았을 때 대부분을 합정역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다. 그래서 나에게 서울은 합정역 부근이었다. 합정역 부근에 살면서 도심에 있는 회사에 다녔던 것이다

처음에 살았던 곳은 사촌언니가 다니던 홀트에서 가까운 합정동이었다. 홀트까지는 걸어서 10분도 안 걸릴 정도로 가까운 집이었다. 마당이 있고 주인아줌마와 아들이 살고 있는 집으로 딸도 셋인데, 다 결혼을 해서 아들만 같이 살고 있었다. 아들은 아저씨가 바깥에서 낳아서 데려왔다고도 들었다. 딸들은 셋이 다 이대를 나왔다던… 밤늦게 들어가서 대문을 열어 달라고 벨을 누르지 못해 그 집 아들과 같이 담장을 넘은 적도 있었다. 어느 날 아들이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교제하는 여자를 데려왔다. 딸들도 색시감을 보려고 다 모였다. 여름이라, 수박과 참외를 내놨더니, 수박이 조금 남았단다. 며느리감이 장래 시누이에게 남은 수박을 권하면서 배가 부르다니까, 화장실 한 번 갔다 오면 될 걸 뭐 그러냐고 했단다. 어떻게 처음에 와서 그런 말을 하냐고 주인 아줌마네는 험담을 했다. 그렇다고 결혼을 반대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에 사촌언니와 같이 살았던 곳은 영진시장에서 합정동 로터리 쪽으로 조금 올라온 곳에 있었던 연립주택이었다. 연립주택에는 젊은 부부가 주인이었다. 아저씨는 목포출신으로 극동건설에 다녔다. 아저씨와 언니는 아직 정식 결혼을 안 하고 사는 상태여서 때때로 언니가 불안해서 술을 마셨다. 집안 격이 다르다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한다는 말도 있었다. 언니는 가냘프게 예쁜 언니였다. 극동건설에 다니는 아저씨와는 가끔 합정동 로터리까지 걸어와서 버스를 탈 때 만날 때가 있었다. 아저씨는 나를 보면 멀리서부터 “돼지야”하고 불러대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때는 지금보다 15키로나 덜 나갈 때라, 돼지라고 불릴 정도로 뚱뚱한 것은 아니었다. 아저씨 나름 애칭이었지만, 나로서는 결코 반가운 닉네임이 아니었다.

중학교때 친구가 재수할 때라, 친구엄마가 나를 찾아와서 친구와 같이 살아주면 안심하겠다고 같이 살아달라고 부탁했다. 나도 사촌언니와 같이 사는 것보다 친구와 같이 사는 편이 훨씬 좋으니까, 친구와 같이 살기로 했다. 친구와는 두 군데서 같이 살았는 데, 처음에 산 곳이 재순이네 집이었는지, 윤정이네 집이었는지 헷갈린다. 윤정이네 집이 먼저다

윤정이네 집은 작은 공원 맞은편에 있었다. 작은 공원에는 개나리가 피었고 어린이 놀이터가 있었다. 윤재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같이 사는 사람들은 주인아줌마와 식모 할머니와 윤정이, 윤재였던 것 같다. 윤정이네서 기억에 남는 것은 고양이 울음소리에 놀랐던 것이다. 처음에는 어린아이가 우는 줄 알고 온갖 상상을 했었다. 윤정이네도 아줌마가 일찍 돌아가셨다. 그 후에 밖에서 사시던 아저씨가 들어오시고 아저씨마저도 사고로 일찍 돌아가시고 윤정이네 형제는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말을 들었다. 국민학교 저학년이었던 윤재는 커서 나와 결혼한다고 했었다. 윤정이와 윤재는 미국에 간 후에 행복하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재순이네 집은 합정역 1번출구에서 나와서 작은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였다. 옛날 일본식 집이라서 좀 독특했다. 겨울에는 집이 아주 추웠다. 부엌은 아줌마네랑 같이 썼는 데, 넓은 부엌이었다. 주인 아저씨는 이북에서 오신 분으로 사업을 하셨는데, 병인가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주인 아줌마는 아저씨가 하시던 사업에 관해서는 몰라서 외동딸과 둘이서 생활이 급변해갔다. 나중에 딸과 둘이 사는 단칸방에도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딸과는 연락을 했었는 데…지금 어디선가 잘 사는지 모르겠다.

친구도 삼수 끝에 대학에 들어가 대학 부근으로 이사했다. 다음에 내가 산 집은 광명이네였다. 광명이는 주인집 아들 이름이다. 위로는 누나가 둘 있었다. 병원에 다니는 아저씨에 몸이 좀 약했던 아줌마가 주인이었다. 나는 주인집 바깥채에 살았다. 아줌마가 몸이 약해서 집안일을 잘 못해서 아저씨는 퇴근해서 돌아오면 현관에서부터 걸레질을 하면서 들어올 정도였다. 나중에 집을 다 밀어서 새로 크게 지었다. 그리고는 나중에 집을 팔고 화곡동으로 이사를 가셨다. 화곡동에 가신 후에도 가끔 전화통화를 했었는 데…

가장 오래 살았던 집은 재순이네 집 바로 옆집이었다. 합정역 1번출구에서 나와서 작은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나오는 모퉁이에 있는 큰 집이었다. 그 동네에서 오래 살아서 여기저기서 밥을 얻어먹고 다니기도 했다. 내가 알던 서교동은 평수가 넓은 단독주택이 많은 곳이었다. 마당에 나무도 많아서 봄에는 목련꽃이 피어서 꽃잎이 담장 밖으로 떨어졌고, 라일락 향기도 났었고 장미나 과일나무도 담장을 넘었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주택가였다.

그런데 이번에 갔더니 옛날 흔적이 거의 없어졌다. 옛날에 다니던 서현교회에 갔더니 교회가 정말 팽창해서 거대해진 느낌이었다.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옛날 건물이 남아있어서 다행이었다. 일요학교에서 유치반을 맡았었는 데, 그 아이들도 나이를 먹었겠지? 다른 곳은 어느 근방인 것은 알겠는 데, 살았던 집이나 주변은 너무 많이 변해서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렇게 내가 살았던 서울의 흔적은 거대한 자본의 힘에 의해서 지워졌다. 자랑스러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청춘을 보낸 곳이었는 데… 내 기억에만 남아있을 뿐이다. 기억을 더듬어 같은 내용을 서울에서 썼다. 남의 컴퓨터로 썼더니 한방에 날아가고 말았다. 합정역 부근에서 살았다는 기억의 기록도 남기면 안 된다는 운명인가도 생각했다. 왜 지워지냐고…다시 썼다

사진을 찍었다. 팽창한 서현교회와 애꿎은 한강밖에 찍을 것이 없었다. 옛날에 살았던 곳에 선 주상복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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