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15 파리 테러, 절망적인 폭력
오늘 동경은 아침부터 흐리다. 그러나, 어제처럼 비가 오진 않아서 나중에 청소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겨울처럼 추운 날씨였다. 어제는 주말에 날씨도 추워서 집에 틀어박혀 지낸 하루였다. 집에서 컴퓨터를 켜놓고 뉴스를 검색하거나 드라마를 보면서 뜨개질을 하며 지내는 휴일인 것이다. 한겨레 신문을 보니 파리 테러에 관한 뉴스 속보가 올라와 있었지만, 일부러 보지 않았다. 속보가 연달아 올라온다는 것은 중대한 뉴스임에 틀림이 없지만, 보고 싶지 않았다. 그저 평온한 주말의 하루를 보내면서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리 테러 뉴스는 밤늦게, 침대에 들어가기 전 목욕탕에 들어가기 전에 클릭해서 읽었다.
뉴스를 읽으면서 눈물이 줄줄 흐른다. 왜 이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고 말았는지, 암울하다… 파리에 사는 파리젠느인 마리는 말려들지 않았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테러로 인한 사망이나, 피해자들에게는 얼마나 큰 충격이고 슬픔이며 상실일까? 말이 테러지, 작은 전쟁이 아닐까, 전쟁은 군인들끼리 싸우는 걸로 되어 있지만, 실은 군인들이 죄 없는 시민들을 죽이고 있다. 그리고 죄없는 시민들이 공격 대상이 되어 죽어가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모른척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이번 일을 계기로 이슬람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조장되어 또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이 곤경에 처할 상황이 벌어질까 걱정스럽다. 폭력은 폭력의 연쇄를 부르니까… 테러를 행한 자들을 옹호할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그들은 왜 자신을 폭탄 삼아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테러를 행해야 했을까를 생각하지 않으면, 폭력의 연쇄를 막을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일에 가담하는 수가 많다. 그런 폭력적인 구조하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리 테러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많은 사람들이 간접적으로 ‘가해자’이며,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어느 한쪽만이라면 일은 좀 단순하며 떳떳하다. 그러나, 암울한 것은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보다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것이 아닐까?
어제 한겨레의 뉴스를 보고 일본 인터넷에 나온 관련 뉴스를 봤다. 뉴스가 별로 없고, 크게 다뤄지는 건 일본 사람들이 피해자가 되었나, 현지에 관광나간 사람들의 안전문제, 공항에서 출국하는 사람들이나, 단체관광이 중지되었거나 현지에 체재하는 유명 탤런트 소식 등이었다. 일본은 항상 그렇다, 나만, 자국민에게만 피해가 없으면 된다는 것이다. 시리아난민에 관해서도 제대로 된 뉴스나 사설도 못 봤다. 강건너 불보기로… 이런 경향은 페북에서도 명확히 갈라진다. 호주나 다른 나라에 있는 친구들은 저마다 애도나 파리 테러에 관한 글을 올렸다. 일본 친구들은 세계적인 뉴스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자신들의 개인적인 일뿐이었다. 나는 친구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에 있으면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자신들과 상관이 없다는 식이 된다. 매스컴에서 보도를 하는 시각도 그렇고… 자신들의 아픔만이 아픔이고, 다른 사람들의 아픔은 자신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 된다. 과연, 그럴까?
시리아 난민만이 아니라, 시리아에서 난민이 나와야 되는 상황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시리아에서 그렇게 대량으로 난민이 생긴 일에 우리는 전혀 무관한 것인지? 그것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다. 그들의 죽음과 아픔이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을 때, 우리의 아픔과 죽음도 그들에게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동경에 살면서 2012년 8월에 일어난 영토문제 이후, 한국에 대해서 얼마나 저주하고 욕을 했는지, 한국사람, 특히 재일동포에 대해 얼마나 ‘폭력적인 차별’이 일상적이었는지 경험했다. 그것에 대해 재일동포가 폭력적인 대응이 나올까, 조마조마 했다. 왜냐면, 그런 일이 발생하면 그것이 '민족차별'을 '정당화'할 빌미로 쓰일 것이 너무나도 뻔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단체로 몰매를 때리는 줄은 꿈에도 모르면서, 맞은 사람이 아프다는 반응을 보이면 그게 문제시된다는 걸 재일동포들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그리고 현명하게도 그런 반응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동안 자신들이 살아온 일본에 절망해서 죽어간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이런 것은 전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없는 일이 되고 만다.
한편 일본 사람들에게는 다 같이 그런 사회분위기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얼마나 ‘광기’에 휘둘렸는지 모른다. 그래서 자신들이 한 일이 어떤 ‘폭력’이며, 어떻게 ‘가해’를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알고 싶지 않다.. 그럴 때, 내가 느낀 것은 ‘폭력적인 차별’을 직접적으로 행하는 소수의 ‘가해자’ 뿐만 아니라, 침묵하는 대다수가 간접적인 ‘가해자’였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외국인이라는 것은 정말로 정치적, 사회적으로 약자이다. 사회적 약자는 그런 것이다.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영문모를 갖은 차별과 수모를 당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사람들은 ‘차별적인 대우’를 해줘야 당연한 것처럼 행동했다. 물론, 중국에 대해서도 했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2012년 8월 영토문제 이후, 2015년 안보 법안이 통과될 때까지, 한국이나 중국에 대해, 한국사람, 중국사람에 대해, 특히 일본에 사는 양국에 관련을 가진 사람들에게 미친 듯이 ‘폭력’을 휘둘렀지만, 일본의 문맥에서 보면 매스컴에 의해 조작된 정보에 의해 양국의 ‘반일’에 대한 아주 ‘애국적인’ 반응이 된다. 죄없는 사람들에게 휘두른 ‘폭력’이 아니라, ‘반일’하는 나쁜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일본인의 ‘애국’을 보여준 ‘정의’이며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그게 이웃에 사는 외국인에게는 무지막지한 ‘폭력’이 된다는 걸 모르는 상상력의 결여다. 인간에 대한 예의 상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폭력’을 당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명확한 ‘차별’이며, ‘구조적인 폭력’인 것을 일본 사람들은 전혀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니,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모르면서도 자신들의 ‘정의’이기에…이런 ‘폭력’은 정치적으로 조작되어 동원된 것이다. 정권의 필요에 의해서 ‘안보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장치로 주변 국가가 ‘적국’이 되어 자신들의 ‘안보’를 위협한다는 명목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베정권이 원하는 대로 ‘안보 법안’이 통과되고 한국은 북한에 대해 일본과 군사적으로 협력을 한다는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하고 있다. 미쳤다.
권력을 휘두르는 ‘미친’ 사람들에 의해 자신들의 ‘미친’ 짓이 ‘정당화’되어 우리를, 세계를 더욱 더 ‘폭력’의 도가니로 이끌고 있다. 제발, 우리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고한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가해자’로 만들지 말아 달라. 동시에 ‘피해자’를 만들지도 말라. 왜, 젊은이들이 자신을 폭탄 삼아 ‘절망적인 폭력’인 테러를 행해야 하는지? 우리가 그들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한 것은 아닐까? 그들의 분노와 절망을 알려고 했을까? 단지, 그들을 극악무도한 사람으로, 같은 종교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을 ‘적대’하는 어리석은 쪽으로 흘러가지 않길 바란다. 그들도, 우리도 다 같은 인간인 것이다.
창밖에 가을햇살이 비추기 시작했다. 암울한 세계에도 따뜻한 가을 햇살이 비췄으면 좋겠다. 나는 세탁기로 빨래를 하며, 청소를 해야지… 암울함도 빨래하고 청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진은 서울, 파주에서 찍은 것이다. 블루박스 앞에 피어있던 맨드라미를 피해자에게 올리는 조화로 다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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