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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회/미소지니와 제노포비아

은행나무

2017/11/11 은행나무

 

오늘 동경은 맑게 개인 날로 단풍이 햇볕을 받아 예쁘게 보이는 날이었다. 어제는 오랜만에 등을 비수로 찔리는 일을 당했다. 나는 가끔 느닷없이 등에 칼을 맞는다. 나를 찌르는 사람은 남자들이다. 그것도그냥 아는 정도의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칼에 찔린 것을 아는 것만 해도 번인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칼 맞은 적도 많은 모양이다. 내가 싸운 적도 없는데 이렇게 나를 잡아먹지 못해 난리를 피우는 적이 많은지 모르겠다. 나를 찌른 '악마'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시리즈로 쓰기로 하겠다. 참고로 나는 어릴 때부터 인간의 탈을 '악마' 봐왔다. '악마' 어디에나 있지만, 일본 특히 내가 속한 세계에는 너무 많다. 다른 곳보다 '악마' 밀도가 훨씬 높은 같다. 아니면 내가 한국인으로 여성이기에 '악마' 앞에서 쉽게 본성을 드러내는 건지도 모른다.

 

어제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동반한 긴 통화를 했다. 덕분에 오늘 아침에 일어났더니 몸상태가 말이 아니다. 역시 스트레스는 무서운 것으로 하루 사이에 다리가 저려온다. 칼 맞은 것은 맞지만 그 영향으로 피를 너무 많이 쏟으면 안 된다. 나의 심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칼 맞는 것도 자주 일어나다 보면 조금은 적응이랄까,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해진다는 걸 느낀다.

 

주변이 아름다운 계절에 날씨가 좋다는 것만으로도 좋다. 아침에 밥을 해서 생선을 굽고 양배추를 삶아서 밥을 먹었다. 원고를 넘겨서 급한 일은 없지만 할 일은 많다. 할 일을 미루고 산책을 가기로 했다. 산책을 가기 전에 빨래를 돌리고 손빨래를 했다. 이불과 베개도 말렸다. 쾌적한 일상을 보내기 위해서 최저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주변에 단풍이 들기 시작해서 시기에 따라 즐길 수 있는 경치가 다르다. 오늘은 걷기 시작하는 코스를 평소 출퇴근 길에 걷는 단풍이 예쁜 장소에 먼저 들렀다. 아직 단풍이 예뻐지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다음은 농가와 무인판매 야채를 사러 가는 코스를 걸어서 작은 배추 한 포기를 샀다.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걸었다. 오늘 사진을 많이 찍은 것은 은행나무다. 은행나무가 예쁠 때는 주위에 은행이 많이 떨어져 있어서 밟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예쁘게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는 보고 싶어도 퀴퀴한 은행 냄새를 집으로 들이기가 싫다. 주위에 큰 은행나무들이 꽤 있다. 은행나무에 따라 아직 파란 것도 많이 남아있다.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들고 잎이 떨어지는 기간이 짧은 것 같다. 내가 산책할 수 있는 날에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보고 즐길 수 있는 날이 이번 가을에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당장 눈 앞에 있는 계절의 아름다움을 즐겨야 한다.

 

동경에 오래 살면서 인간들의 추악함을 일상적으로 보지만, 계절의 변화를 나타내는 주변 경관만큼은 예쁘다. 주변 경관도 거목을 가차 없이 잘라내서 날이 갈수록 휑해지면서 경치조차 빈곤해지는 느낌이 들게 하지만, 단풍이 드는 계절에는 단풍 색감이 빛나서 휑해진 공간을 채우고 남는다. 내 창문 밖 벚나무도 야금야금 잘리면서 팔과 다리를 잃어가더니 요전에 한 그루는 완전히 잘라내고 하나는 몸통만 남겨놨다. 거목이 나란히 섰던 자리에 이상하게 빈자리를 만들었다. 나무가 잘려나가는 걸 지켜보기가 싫어서 도망갔다. 큰 나무가 없어졌으니 겨울에는 바람이 더 불고 여름에는 햇볕이 더 많이 쪼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꿈같은 풍경을 연출하던 거목이 없어지면 너무 허전하다. 주변을 정비하는 사람들에게는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나무와 어떤 교감을 하는지 중요하지 않겠지. 아파트가 오래된 낡은 건물이라, 주위에 나무가 없어지면 그 초라함이 극대화된다. 나무가 있으면 오래된 낡은 아파트가 나름 괜찮게 보이는데, 정비하는 사람들에게는 상관이 없겠지.

 

내가 보기에 일본에서 일하는 방식이 내가 사는 주변 경관을 관리하는 것과 비슷하다. 돈을 들여 가면서 주변 경관을 오히려 망치는 것이다. 주변 경관을 관리하고 있다는 명분으로 정작 주변 경관을 망치면서 관리하는 회사는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을 줘가면서 '관리'라는 명목으로 경관을 망친다. 결국, 누구와 무엇을 위한 정비인지 알고 싶다. 추악한 인간들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를 힐링할 수 있는 경치까지 망가뜨리면 사람들이 살기가 힘들다. 일을 진행하는 것을 보면 참 은밀히 교묘하게 망가뜨리는 것이 대단하다. 주변 경관을 망가뜨리는 것도 간접적으로 거기에 사는 인간을 망가뜨리는데 일조하고 있다. 똑똑한 척을 하지만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남아있는 예쁜 것들을 보고 즐겨야지. 오늘은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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