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07 상실감
오늘 동경은 흐리다가 맑은 날씨였다.
그래도 낮에 밖에 나갔더니 춥지는 않았다.
어제는 아침에 일어나보니 눈이 와서 걱정을 했다. 눈이 그대로 쌓여서 밤에 얼을 줄 알았다. 외출을 할 때 눈이 비 같이 와서 우산을 쓰고 나갔지요. 길을 걷다 보니 눈이 쌓였는 데 눈이 내리며 녹아서 길이 미끄러웠습니다. 근데, 시내에 도착해 보니 거기는 눈이 아니라 비였다는 겁니다.
그저께 밤에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내가 박사논문을 쓸 무렵에 같이 살았던 분이 돌아가셨다고, 그 분과는 80년대 후반부터 알아서 유학생 관련 상담을 하는 볼런티어 그룹을 운영했지요. 그 분은 거기 대표셨고 저도 거기서 활동을 했었지요. 90년대 중반은 일본의 버블경기가 끝나도 제가 사는 곳은 땅값이 비싸서 세금도 비쌌지요. 그 때 살던 집 엄마는 이사 갈 때 나를 같이 데리고 가니, 집을 파는 것에 신경쓰지 말고 박사논문에 전념하라고 했지요. 그러면서, 오늘은 이런 집을 보고 왔다, 연예인 누가 거기에 산다더라, 억대가 되는 아파트는 보통 연예인들이 살았지요.
그런데, 저는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데 좀 시간이 걸리는 사람입니다. 언제 집이 팔릴지, 이사를 해야 할지 모르는 게 불안해서, 저는 그 전부터 알던 선생님네로 갔지요. 방 세 개짜리 아파트에 선생님과 제가 살았지요. 선생님은 아침부터 일을 하러 나가시고, 저는 좀 늦게 일어나 밥을 먹고 학교에 가서 연구실에서 논문을 쓰다가, 집에 가면 밤 12시가 됩니다. 그리고 저는 일을 할 때는 쉬는 날도 없이 일을 합니다. 선생님은 평생 프리랜서로, 각본을 쓰는 일도 했었는 데, 저처럼 쉬지 않고 글을 쓰는 사람을 못봤다고 합니다. 제 논문이 아주 방대한 양으로 자료집이 다섯권이나 되었는데 그 걸 선생님이 워드로 다 입력했습니다. 자료집 중 세 권이 오사카에서 수록한 오사카방언으로 된 라이프 히스토리였지요. 그러니까, 일이 아주 귀찮은 겁니다. 그리고 시대상황을 검증하는 것도 선생님 몫이었습니다. 다른 부분은 또 다른 선생님들이 도와주셨습니다. 저는 제 논문을 지도교수의 지도도 없이 혼자서 했지만 옆에서 조수처럼 제 손발이 되어 도와주셨던 분들이 다 프로였습니다. 에디터스쿨에서 가르치는 분을 비롯해, 작가가 몇 분 계셨고, 그 분야 전문가 선생님도 계셨지요. 그 분들이 다 제 지휘에 따라 손과 발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쓴 논문은 어떤 편집자도 손을 댈 수가 없었답니다. 저는 단지, 제가 하는 분야를 편집자가 몰라서 그랬다고 생각했었답니다. 그 대신 일이 아주 엄격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인간적으로 따뜻하거나 인정이 있는 분은 아니였지요. 식민지시대에 대전에서 태어났답니다. 아버지가 의사고 형제분이나 친척들도 의사가 많지요. 아버지가 동경대학, 선생님을 비롯해서 형제, 남편, 자녀 분들도 다 동경대학을 나왔지요. 선생님은 전후 여자로서 처음으로 동경대학에 들어간 걸로 압니다. 결혼했으나 아드님을 낳고 이혼 했지요. 그 시대에 이혼하는 일도 드물었을 겁니다. 남존여비가 뿌리깊은 일본에서 여자가 건방지게 동경대학을 나왔으니 결혼하기도, 취직하기는 더욱 어려웠지요. 그래서 평생 프리랜서로 남자들 세계에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아주 강한 분이셨지요.
아드님과도 나이를 먹어서야 다시 만났지요. 선생님은 어린 아들을 두고 이혼 하셔서 마음 속에 항상 아드님께 미안한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선생님은 연애결혼을 했는 데, 결혼 할 때 집안에서 반대를 했나 봅니다. 선생님네 집에서 결혼할 때 상대네 집 형편이 넉넉치 않다고 반대 했다고 원망을 했지요. 그런데 저에게 친구가 전화를 하면 선생님이 물었지요. 그 남자네 집 잘사느냐고, 저는 왜 그게 궁금한 지 전혀 감이 안잡혔지요. 선생님도 저를 걱정하다 보니 그랬나 봅니다. 결국, 선생님도 세상 사람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지요.
선생님 어머님이 90세를 넘기셨지요. 그래서 선생님도 오래 사실 줄 알았습니다. 저에게는 너무 엄격하기만 했지요. 밖에서는 제자랑을 그렇게 했다고 하는 데, 저에게는 엄하기만 했습니다. 저는 논문을 마쳐서 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혼자서 방을 얻어 생활 할 정도가 되니 이사를 했지요. 그냥 학생시절 연장선에서 살면 안될 것 같아서 나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 제가 해드리고 싶었던 한국여행을 아드님과 같이 갔지요. 선생님이 태어나신 대전에도 갔었지요. 저는 그걸로 선생님께 해드릴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인간관계를 매듭 지었습니다. 저는 그 걸로 선생님과의 관계를 정리했습니다. 그 후 저는 일체 연락을 하지 않았지요.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서 놀랐습니다. 그러나, 좋은 기억이 별로 없더군요. 저에게 엄하기만 했던 것, 인정이 없었던 것, 힘들었던 것이 주된 기억이라, 씁쓸했습니다. 선생님이 저를 인정 해주신 부분도 있습니다. 글쓰는 재능이 있다고, 디테일에 아주 강하다고, 드물게 디테일을 가지고 전체 문맥을 표현한다고 했지요. 선생님은 평생 글을 쓰고 사셨으니, 웬만해서 인정을 안하시는데 인정하시더군요. 그런데 저는 글을 쓰는 것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일을 아주 잘하시고 신뢰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아마, 선생님도 외로우셨을 겁니다. 그렇게 사는 걸 택했으니까요. 어제 장례식에서도 그다지 슬프지 않았습니다. 다른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혼자서 사시다가 돌아가셨으니 대단하십니다. 마지막까지 선생님 다웠습니다.
그런데요, 그렇게 정리됐던 관계였는데, 오늘 어찌할 줄 몰라 방황했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밥을 해서 폭식 했습니다. 아마, 이게 선생님이 돌아가신 상실감인가 봅니다.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상실감이 폭식을 하게 했나 봅니다. 머리로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는 데, 몸에 새겨진 기억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오늘도 동백꽃입니다. 내일도 동백꽃일 겁니다. 저는 숲에서 동백꽃과 다른 나무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걸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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