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4/22 무대에서
오늘 동경은 화창하게 맑은 날씨였다.
어제까지 비가 오고 흐린 날씨였는 데, 오늘은 맑았다. 그래도 기온은 낮아서 따뜻하지 않았지만, 맑아서 기분이 좋았다.
어제와 그저께는 촉촉히 젖은 창밖의 벚꽃나무에 새들이 날아와서 놀고 있었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다니며 지저귄다. 작은 새들이 뽀로롱 뽀로롱, 뽀롱 뽀롱 하고 난다. 가지를 옮겨다니면 가지가 흔들린다. 한참을 질리지도 않고 보고 있었다. 새들도 한참을 그렇게 놀고 있었다. 이럴 때는 새들이 내가 심심할까 봐 위로공연을 하는 거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정신없이 멍하니 보고 있다. 많은 새들이 부산하게, 천천히 날고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게, 마치 악기를 연주해서 소리를 내는 과정을 보는 것 같다. 가끔은 이런 꿈같은 순간이 창밖에서 전개된다. 나만을 위한 특별한 콘서트처럼…
오늘은 아침에 좀 늦게 일어나서 이불과 베개를 볕바른 곳에 널었다. 요가를 하고 빨래도 조금하고 아침을 먹고 나서 청소를 했다. 이 걸로 오전은 지나고 말았다. 별로 한 것도 없는 데, 시간이 금방 지났다.
오늘은 목요일에 수업이 있는 여성학을 준비해야한다. 수요일 수업이 끝나면 그 길로 4.3항쟁 65주년 기념행사를 도우러 갈 예정이라, 오늘이 아니면, 준비할 시간이 없다. 점심을 먹고 오후 늦게 입력을 시작했다. 거의 입력을 마치고 산책을 나설 작정이었다. 중간쯤 했을 때,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갑자기 입력이 안된다. 카솔도 안 보인다. 움직이지 않는다. 라디오를 듣고 있어서 음악은 그대로 나오는 데, 화면이 정지된 상태다. 뭐야, 마우스에 새건전지를 넣어보고, 키보드에도 새건전지를 넣어 봐도 새로운 움직임이 없다. 요새 왠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컴퓨터가 돈 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 징후는 없었지만, 그냥, 불안했다. 근데, 이렇게… 갑작스럽다. 이것저것을 점검했다. 별다른 점이 없다. 드디어 컴퓨터를 강제로 끄려고 했더니, 강제로 못 끈다고 고집을 부린다. 컴퓨터가 상전이다. 내가 강제로 콘센트를 뺐다. 그리고 다시 켰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움직인다. 그런데, 이것저것을 점검하면서 당황스럽고 황당했던 30분간의 긴장감으로 갑자기 피곤이 확 몰려온다. 그동안 라디오에서 나온 음악은 재즈였다. 음악이 나를 약 올리는 것 같았다. 컴퓨터를 상대로 싸울 수도 없고, 정말로 약이 올랐다. 이 상태에서는 일이 안 되겠다. 컴퓨터에 이상이 있으면 학교에 갔을 때, IT부서에 가서 물어본다. 아니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회복이 되었으니 다행이다. 불안했던 예감이 적중했다.
일찌감치 저녁으로 연어를 한 조각 구워 먹고 산책을 나갔다. 걷는 동안에 괜히 기침을 했다. 내가 좀 놀랬나 보다. 산책을 하면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조금 기운을 회복하고 돌아왔다.
지난 수요일에 500명 수업을 하는 교실이 바뀌었다. 바뀐 교실에 가보니, 교실이 아니라, 영화를 보거나, 연극을 하는 극장이었다. 무대가 높은 영화관을 상상하면 된다. 600명이 정원이란다. 원래, 강의를 하는 곳이 아니란다. 영화를 보거나, 영상을 보는 곳이란다. 교실에 들어가니, 교실이 아주 어두컴컴하다. 이 상태에서는 어두워서 학생들이 자료를 못 읽겠다 싶었다. 그리고 올라가 보니, 거기는 아주 큰 무대였다. 보통 때도 강의를 하는 것은 고독한 일인극이요, 독무대다. 그래도 교단과 교탁이라는 무대가 작다. 학생들과도 가깝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대가 횡댕그렁하니 엄청 넓고 크다. 그리고 정말로 무대다. 내가 올라가서 교탁으로 쓸 테이블을 끌고 오고, 화이트보드를 가져가도 너무 작고 펜도 가늘다. 그리고, 좌석이 옆으로 펼쳐지지 않고 길게 앉았다. 입구도 극장처럼 양쪽에서 입장이 가능하다. 시간이 되니, 막이 열리고 연극이 시작되는 것처럼 조명이 비치고, 무대가 밝아진다. 무대가 밝아지면서 학생들이 앉아있는 곳도 밝아진다. 그래도 내가 있는 곳에서는 앞에 앉은 학생들도 잘 안 보인다. 중간 이후에 앉은 학생들은 분간이 어렵다. 내가 마치 작은 섬에 있고 넓은 바다를 건너야 학생들이 있는 것처럼 거리감이 있다. 무대에 선다는 감각이 이런 것이구나.
지금까지 일을 하면서 크고 작은 많은 무대를 밟아왔다. 아주 호화판, 국제 세미나에도 주역급으로 많이 갔었다. 물론 관객이 아닌, 무대에 서는 사람으로서… 그런데, 진짜 연극무대에는 선 적이 없었다. 내 팔자에 이렇게 큰 연극무대에 설 일이 있을 줄 몰랐다. 진짜 무대에 서 보니, 고립감이 더 크다. 강의, 즉 움직임도 없이 입만 가지고 90분간 학생들을 주목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학생들이 내가 웃기는 사람이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내가 웃기는 말을 한 것도 아닌 데, 아주 자지러진다. 그 걸 보면서도 현실감이 없을 만큼 거리감이 있다. 다행히 학생들의 기대감도 느껴진다. 수업을 도와주는 학생이 두 명 있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앞에 앉은 학생이 나를 쳐다보는 각도를 보니, 무대가 좀 높다. 설비가 좀 오래된 곳이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지난주 감상문을 피드백한다. 올리브님의 댓글도 소개했다. 학생수가 너무 많다고 학교에 항의를 안 하냐고, 내가 직접 학교에 항의하라는 말은 못 하니까, 돌려서 말을 한다면서... 한 학생이 그런 생각을 못했다면서 한국사람들은 아주 적극적인 모양이라고, 자신도 적극적인 태도를 수업을 듣겠단다. 여학생은 정원제를 하지 말아 달라고 그래야 자기가 수업을 들을 수 있단다.
무대는 정해졌다. 학기가 시작되어 달리기 시작했으면, 학기말이라는 골을 향해서 달려야 한다.
어제저녁에 비가 온 후에 찍은 꽃들이라, 좀 젖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