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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회/미소지니와 제노포비아

해괴한 논리

2018/05/05 해괴한 논리

 

오늘 동경은 화창하게 맑지만 덥지 않은 상쾌한 날씨였다. 요새 저녁에 운동삼아 산책하는 재개했다. 어젯밤에도 산책을 했다. 저녁을 일찍 먹거나 가볍게 먹고 산책을 하면 밤에 늦게 자도 다음날 아침 가뿐하게 일찍 일어나게 된다. 어젯밤에도 늦게 잤지만 아침 일찍 일어났다. 산책을 계속해서 몸이 가뿐해졌으면 좋겠다.

 

아침부터 라면을 먹고 벼룩시장을 보러 갔다. 오늘도 벼룩시장은 작고 물건도 적었지만 가격이 비싸도 사람들이 많았다. 경쟁률이 높았다. 오늘도 산 것은 별로 없다. 벼룩시장을 보고 도넛을 먹었다. 적십자사에서 물건을 사는 곳에 들러서 살 것이 있나 봤다. 작은 빨간 목각 인형이 있었다. 타월과 같이 사려고 물었다. 자원봉사를 하는 분이 기분 나쁘게 말을 한다. 어제도 외국인에게 차별하는 태도로 물건을 파는 걸 봤다. 다른 가게도 마찬가지지만, 적십자사라서 기분이 나빴다. 적십자 정신과 다르지 않나? 기부받은 물건을 사는 것도 기부하는 행위이다. 거기에는 외국인이고 아니고는 관계가 없다. 근래 벼룩시장에서 열심히 물건을 보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로 경제적으로 곤란하고 정신적으로도 힘든 상황인 사람들이 있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 태도가 노골적으로 싫어한다. 외국인에 대한 차별은 알기 쉽지만 같은 일본 사람이라도 가난한 사람에게 대한 차별은 은근하지만 참 불쾌하다. 항상 궁금하다. 같은 물건을 팔면서 기분 좋게 하면 안 되나?? 적십자사에서 파는 것은 사지 않았다. 사서 집에 가져와서 볼 때마다 불쾌했던 걸 기억하기가 싫다. 단지 100엔, 200엔 싸다는 것보다 기분이 훨씬 중요하다.

 

네팔 아이가 일본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나 보다. 그저께도 말이 통하지 않았다. 지금 인도회사에서 인도 사람들과 같이 일한다. 그래서 인도와 인도 사람들에 대해서 새로 알게 된 것이 많다고 한다. 인도도 남북차가 심하다고 말이 통하지 않아서 서로 영어로 대화를 한단다. 인도의 높은 교육열과 심한 경쟁을 일하면서 많이 느낀다고도 한다. "인도 사람 괜찮다, 인도 사람 똑똑하다"라고" 연발한다. "인도 사람이 말하길 일본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 일본어 배울 시간에 기술을 더 배우는 게 낫다"라고 했단다. 내가 일본어를 제대로 하라고 잔소리했던 것에 대한 대답인 모양이다. 그러면서 "일본어가 중요하지 않다"라고 한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 말을 잊었다. 인도 사람 말이 맞고 일본어를 해야 된다는 내가 틀렸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일하면서 일본어를 몰라도 되는 것은 특수한 경우지. 단기로 특별한 경우에 한한 것이다. 자기처럼 일본에 유학 와서 일본어학교 2년에 대학 4년을 졸업한 사람이 기본적인 일본어조차 못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번 회사도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했으니 일본어가 좀 될 것이라는 이유로 채용된 것이다. 평소에 대화도 통하지 않는 걸 보면 대학 강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 걸 지금와서 "일본어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가 된 것이다. 같이 일하는 인도 사람들은 엔지니어들이다. 그들은 기술이 있어서 일본어를 못 해도 일본에서 일하는데 지장이 없단다. 인도 회사에 다니며 인도 사람들끼리 모여서 산다. 일을 할 때는 영어로 하니까, 일본 회사에서도 그에 맞게 대우한단다.

 

회사 동료와 자신의 처지가 다르다는 걸 혼동하는 건지 아니면 일본어를 못한다는 자격지심에서 자신을 정당화할 이유를 발견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해괴하기 짝이 없는 논리다.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걸 너무나 잘 알면서 해괴한 논리로 정당화하는 게 괴이하다. 연구대상이다.

 

 

요새 읽는 책도 그렇다. 요점은 이혼한 경우 친권이 한쪽에게만 주는 현행법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혼해도 공동양육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경우를 사례로 해서 운동을 주도하는 입장에서 쓴 것이다. 이혼에 이른 사정과 그 후에 일어난 일을 보면 이혼한 부인이 친권을 가져가서 책을 쓴 저자와 만나고 싶지 않다는 걸 잘 알 수 있다. 부인은 이혼과 동시에 아이들을 데리고 재혼했다. 이혼하기 전에 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가정폭력은 피해자가 폭력이라고 느끼면 폭력이 되는 가해자를 도외시한 이상한 것이라고 한다. 가해자 입장에서는 물리적 폭력을 행사할 만하니까,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그럴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폭력을 휘둘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는 맞을 만하니까 맞은 거니까, 감당하라는 것인가?

 

그동안 맞고 살거나 죽었던 여성들이 가정폭력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최근이다. 가정폭력을 당하면서도 아이들을 생각해서 아니면 복수가 두려워서 도망가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원만하게 이혼해서 이혼한 후에도 아이를 공동 양육할 수 있다면 이혼한 부인과 아이에게도 좋은 일이다. 일본에서는 남편들이 아이 양육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혼 후에도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싱글맘이 아이들을 데리고 고군분투하면서 살아간다. 남편들, 아이 아버지들이 양육의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위해서 공동양육권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원만한 이혼이 어려워 이혼 후 공동양육을 꿈꿀 수도 없는 것이 대다수다.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도망친 경우, 남편이 추적해도 거주지를 알려주지 않도록 되어 있다.

 

결혼생활 중에 아이의 양육에 책임을 지지 않는데 이혼 후에 공동양육을 할 수 있을까? 결혼생활 중에 아이 양육에 책임을 졌다면 이혼에 이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성이 생각할 때는 결혼생활에서 아이의 양육에 관심이 없던 남편이 이혼 후에 공동양육을 할 것이라고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 남편이 힘들어서 이혼에 이른 것이다. 이혼 후에도 아이들을 이유로 불편한 전남편을 만나야 한다면 여성에게 힘들고 그 스트레스는 아이들에게 갈 것이다. 재혼했을 경우라면 더 복잡해진다. 공동양육으로 갈 길은 요원하다. 그 걸 전남편 입장에서만 주장하는 것이 해괴하게 보인다.

 

해괴한 논리가 마치 정당한 것처럼 활개를 친다는 것은 위험하다. 약자를 보호하고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것이 맞다. 해괴한 논리가 통과한다면 상대적 강자에게만 좋은 세상이 되어 더 많은 피해자를 만들어 낸다.

 

 

사진은 이전에 찍은 것이다. 콩꽃은 벌써 콩이 되어 수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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