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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회/미소지니와 제노포비아

위력과 사랑 사이

2018/08/21 위력과 사랑 사이

 

오늘 동경은 최고기온이 34도까지 올라간 뜨거운 날씨였다. 며칠 동안 선물처럼 선선한 30 이하인 날씨로 지내다가 다시 뜨거운 날씨로 돌아왔다. 며칠 폭염이 끝나고 가을이 같았는데 잠시 여름이라는 잊었다. 오늘 오전부터 뜨거운 날씨였다. 오늘도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왔다.

 

요즘 집중해서 읽는 책은 여성의 빈곤에 대한 것이다. 여성의 빈곤에 대한 책을 읽다 보면 참 힘들다. 여성의 빈곤이 마치 여성 개인적 문제인 것처럼 인식하는데 사회구조에 의한 것이지 여성 개인의 책임이 아닌 부분이 크다. 어린이 빈곤과 같다. 어린이들이 가난하고 싶어서 가난한 것이 아니다. 어린이가 어떤 가정에 태어나느냐이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일본도 남녀불평등으로 선진국에서 최악, 남녀평등 지수에서 세계적으로 100위 밖에서 맴도는 나라다. 일본에서 빈곤은 21세기에 들어와서 갑자기 '자기책임'이라는 말을 고이즈미 총리가 내뱉고 유행하더니, 사실인 것처럼 사람들이 여기기 시작했다. 개별적인 여성의 상황을 보면 마치 '자기책임'으로 보이는 면이 있다는 걸 부정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개별적으로 보지 않고 신뢰할 수 있는 전체적인 통계로 같은 학력의 남성과 여성의 수입을 비교하면 성차별이 얼마나 심각한지 부정할 수가 없다. 사회가 어떤 여성이든 기본적으로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만든 것이다. 결혼해서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여성은 일을 해도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람직한 여성은 무조건 '순종적'이어야 한다. 어떤 부당한 일이 있어도 '순종적'으로 받아들이길 원한다. '순종적'이지 않을 경우, 그 이유만으로 여성으로서 못된, 시건방지다고 수많은 공격을 받게 된다. 실제로 여성이 빈곤한 처지에 놓이는 데는 남성들이 일조한다. 남성들이 일조하지 않으면 사회구조가 여성이 빈곤하게 되는 구조여도 일해서 먹고살 수 있다. 그런데, 여성들이 빈곤한 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그녀들을 빈곤한 처지에 몰아넣은 남성이 보이지 않는다. 남성들이 자신이 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사회가 남성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게 방임함으로 약한 입장에 있는 여성이 과한 책임을 져야 하는 구조다. 그래서 여성의 빈곤이 대물림하는 현상을 묵인하고 있다. 이런 책을 매일 읽는 것은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필요로 한다.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한 나에게 위로가 필요하다도서관에 오며 가며 사는 신선한 야채나 과일로 위로를 받는다. 공원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서 짧은 수다를 떨 수 있어도 좋다.

 

 

한국에서 안희정의 '위력'에 의한 '성폭행'이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다. 재판에서는 '위력'에 의한 강제력이 있었다고 볼 수 없었다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한다. 일본 대학에서 '성폭력'을 행사한 가해자, 교수들이 하나같이 '연애감정'이었다고 한다. 피해자인 여학생은 교수에게 자신들 인생이 걸려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한 '성폭력'이라고 한다. 언제까지 가해자와 피해자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이전에는 가해자가 한 말을 중심으로 판단했다. 지금은 사회가 변했기 때문에 피해자 편에서 보려고 노력한다.

 

내가 속한 세계는 대학이다. 일본에서 대학이나 대학원은 기본적으로 폐쇄적인 도제 제도라고 보면 된다. 지금은 대학에서 졸업논문을 쓰지 않아도 되는 곳도 많아졌지만, 통상적으로 졸업논문을 써야 한다.. 특히 대학원에 진학할 경우 학부를 졸업해서 취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학부에도 지도교수 연구실을 중심으로 하는 제미라는 것이 있다. 지도교수 연구실에 속한다는 개념이다. 지도교수에게 당하는 크고 작은 '성폭력'이 그렇겠거니 하고 지나친다.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그중에서도 극소수로 피해자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경우다. 왜냐하면 대학은 아무리 '성폭력'방지 위원회가 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교수 편이기 때문에 애매하다고 볼 '성폭력'일 경우는 학생이 문제학생이 되고 만다. 문제가 제기되기까지 많은 단계를 밟기 때문에 학생이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금방 문제가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런 상황을 학생이나 교수도 잘 알고 있다.

 

대학원생의 경우는 교수의 전문분야에서 장래 일을 할 가능성이 크다. 대학에 남는다면 더욱더 그렇고 기본적으로 지도교수에게 '순종적'이지 않으면 학위를 받을 수도 없고 대학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는 구조다. 지도교수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인생이 좌우되고 만다. 만약에 교수에게 여학생이 '성폭력'을 당해도 눈물을 머금고 남거나, 문제제기를 한다면 대학에 남고 싶다는 자신의 캐리어/인생을 포기해야 한다. 이미 그 좁은 세계에서는 문제를 일으켰다는 '낙인'이 찍히는 것이다. 이상하다. 가해자가 아닌 억울하게 당한 피해자가 매장을 당하다니, 그런데 사실은 그렇다. 피해자가 약자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학생은 독안에 든 쥐인 것이다. 학생들의 학위, 인생이 교수들 손아귀에 있다. 교수들은 그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아무리 권력이 없는 것처럼 행동해도 지도교수에 목숨줄이 달려 있어서 학생들이 '의의제기'를 할 수가 없다. 이공계가 아닌 경우는 대학원에 가면 사회에 나갈 선택의 폭이 아주 좁아진다. 대학원에서 문제가 생기면 무난하게 취직하는 길도 없고 험난한 인생이 예약된다. 남성이라면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여성인 경우 아주 제한된다.

 

일본 대학에서 '성폭력' 문제가 불거지면 교수들이 하는 말이 정해져 있다. 학생과 '연애감정'이었다고 한다. 교수의 권력(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아니라, 연령과 지위를 초월한 아름다운 '사랑'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에 교수가 말하듯 쌍방이 합의한 '연애'였다면 여학생이 자신의 인생을 걸고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를 상담하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부모에게 알려지는 것이다. 다음은 주위에 알려지는 것이다. '성폭력'이 문제가 되면 뉴스로 나가기 때문에 부모는 물론 주위만이 아니라, 전 국민에게 알려지는 상황이 된다. 피해자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도 어렵게 된다. 한국에서는 이런 경우 여학생에게 교수와 '불륜'을 했다고 손가락질하려나?? 일본에서는 여학생이 '성폭력' 피해를 당해서 인생이 쫑난 것이지 교수와 '불륜'이라고 보지 않는다. 보통 젊은 여학생이 나이든 교수와 '불륜'을 원할 것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교수는 여학생이 유혹했다고 '꽃뱀'으로 몰아 가기도 한다. 여학생이 교수를 유혹해놓고 '성폭력'으로 고발한다는 것은 소설에서나 가능하지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남성들은 참 쉽게 그런 소설을 쓴다. 여성들이 자신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몸을 던진다는 식이다. 실제로는 아주 다르다. '성폭력' 피해를 입은 사람은 그 걸로 인해 '지옥'에 빠진다. '성폭력'을 고발한다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과 주위사람들까지 '지옥 맛'을 봐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자신이 죽으면 죽었지 가족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 피해자가 자학적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아 실질적으로 대학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기 어렵다.

 

교수들 중에는 자신들 권력에 순종하는 학생들을 자신의 개인적인 매력에 순종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자신이 알게 모르게 가진 권력에 다치고 싶지 않은 학생들은 순종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무시하고 싶다. 자신의 가진 매력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는 환경은 기분이 좋을 것이다. 여성들이 직장 상사의 부당한 요구를 수용하는 것은 연애나 사랑인가? 상사이기 때문이다. 그게 위력이라는 것이니까. 지극히 사적인 감정인 연애나 사랑까지 위력으로 지배하고 싶은 것이다. 폭력을 연애라고, 사랑이라고 위장한다. 권력은 그런 것도 가능하게 만들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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