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23 성추행을 당한 학생
오늘 동경은 겨울날씨처럼 아주 추웠다. 아침에 일기예보를 보고 추울 것 같아서 다운코트를 꺼내서 입었다. 11월에 다운코트를 입는 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지만, 추운 걸 어찌 할 도리가 없다. 옷을 껴입고 나갔다. 아침에는 괜찮았는데 오후가 되니 더웠다. 실내는 난방이라서 안에서는 덥다. 저녁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요새, 모럴 해러스먼트와 성폭행에 관한 글을 쓰다 보니, 본의 아니게 지금까지 상담했던 '피해자'들이 떠올라서 마음이 이상해졌다. 내가 '피해자'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가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에 의한 것이 아니다. 본인이 직접 당한 것을 나에게 '증언'하는 것을 듣고 아는 것이다. '피해자'들의 상담을 했다고 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피해자'들에게는 우선 자신들의 말에 귀를 귀울여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들의 말을 들을 때는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비판하거나, 추궁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상처' 입고 '아픈'사람들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전달된다. 긴 시간이 지나도 그들의 '아픔'이 나에게도 남아 있다.
요즘 '마녀의 법정'이라는 드라마가 재미있을 것 같아 첫 회부터 보려고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 얼마 안되서 도저히 보지 못할 것 같아 끄고 말았다. 첫 회에 '성폭행'을 당했던 '피해자'인 것 같은 여성이 녹음 테이프를 씩씩한 검사에게 전하려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장면까지 보고 껐다. 검사는 이미 올라왔는데, 엇갈리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 했다. 거기까지 '피해자'를 잠깐 보면서 '아픔'이 전해와서 내가 아팠기 때문에 보면 안될 드라마 인 것이다. 내가 그런 일을 당한 것도 아니지만 '피해자'의 '아픔'을 전해 받은 것이 체내와 기억에 저장이 되어 있는 모양이다. 내 몸에 있는 기억이 어떤 자극을 받아 '아픔'의 기억이 되살아 나거나, 다른 '아픔'을 감지하는 모양이다.
정말로 오랫만에 '성추행'을 당해서 '피난'을 왔던 학생이 생각났다. 잘 살고 있겠지? 그 학생은 원래 내 학생은 아니었다. 당시 그 대학원에서는 드물게 외부에서 그것도 대도시의 명문 사립대 출신이 들어온 것이었다. 대학원에는 여학생이 드문 시절에 학부 때 지도교수가 나와 아는 사이로 나와도 가깝게 지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지도교수 인솔하에 필드웍을 다녀와서 이상한 느낌으로 내 연구실에 왔다. 학생들이 상담할 것이 있으면 다른 교수들이 퇴근할 것을 기다렸다가 내 연구실로 왔다. 내 연구실에 와서 울고 가거나, 소파에 앉을 힘도 없어서 누웠다가 가는 학생들도 있었다. 워낙 학부 자체가 '모럴 해러스먼트'로 충만한 환경이었다.
학생은 어렵게 말을 꺼낸다. 필드웍에 나가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한다. 내가 뭘 어떻게 해주길 바라느냐고 물었다. 학생이 말하길, "저는 주위에 알려지고 싶지 않아요. 특히 부모님께는 절대로 알려지고 싶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면서 저를 사립대학을 보내주셨고 대학원까지 보내주셨는데, 이런 일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아직, 대학원이 남았는데 주위에 알려지면 학교생활이 어려워집니다. 아무도 몰랐으면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학생은 구체적인 상황을 말하면서 미쳐가는 것 같았다. 앉은 자리에서 살이 빠지는 것 같았다. 몸에서 기름이 빠져나가는 것이다. '성추행'을 당하고 와서 혼자서 견디면서 온갖 생각을 다하고 온 것이었다.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절 구해주세요" 구체적으로 어떤 걸 원하느냐고 했다. "잠도 못자고 무서워서 자취방에 혼자서 지낼 수가 없다"고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면 안되겠느냐고 한다. 우선, 우리집으로 와서 같이 지내자고 했다. 일정상으로 일주일 쯤 있으면 부모님 집에 가서 긴 시간을 보내도 될 것 같다.
집에서 같이 지내는데, 학생이 '아기'가 되서 껌딱지 처럼 들러 붙어 나를 쫗아 다닌다. 화장실에도 쫗아왔다. 잘 때도 같이 잤다. 같이 온천 목욕탕에 가서도 너무 밀착해서 "너 그러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본다"고 주의를 줄 정도였다. 나는 당황스러웠고 불편했다. 나는 누구와도 가족과도 그렇게 밀착하는 생활을 한 적이 없다. 학생은 '아기'로 돌아가서 온전히 나를 의지함으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모양이었다. 나도 '피해자'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 위주였고 필요하면 다른 것을 소개하거나, 지속적으로 상담을 하면서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돕는 것이었다. '피해자'가 집까지 와서 상담을 한 적도 있지만, 같이 지내는 일은 없었다. '아기'가 된 '피해자를 보면서 이렇게 되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단지, 눈 앞에 닥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뿐이었다.
그때에 학생에게 권한 것이 '뜨개질'이었다. 내가 재료와 도구를 다 제공했다. 다른 일에 집중해서 '성추행' 당한 것을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학생이 '뜨개질'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필사적으로 매달려서 며칠 만에 원피스라는 대작을 완성했다. 왠만큼 '뜨개질'을 하는 사람도 며칠만에 그 정도 대작을 완성하기는 어렵다. 학생이 '뜨개질'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이 자신의 처한 상황에서 빠져나가려는 몸부림으로 보였다. 자신의 '상처와 아픔'이 손길에 따라 '뜨개질'이 되었다. '뜨개질'을 완성해서 부모님 집으로 갔다. 그 때는 몰랐지만, '회복'하는데 '뜨개질'은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다음에는 많이 안정된 것 처럼 보였다. 내가 의도적으로 화제에 올리지 않았다. 명랑하고 활발했던 아이가 더 이상 명랑하고 활발하지 않았다. 그 영향인지, 제대로 취직을 못했다. 나는 애써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졸업식에는 부모님이 나에게 인사를 한다고 찾아 왔다고 한다. 출장이라, 만나질 못했다. 졸업 후에도 가끔 연락이 왔다. 몇 년이 지난 후, 자신이 원하던 유명호텔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 동경에 가면 선생님 집에 재워 주세요. 전에 선생님 집에서 지낼 때 먹었던 양념장이 가끔 생각이 나요. 그 것도 만들어 주세요" 했다. 나는 그런 기억이 없다. 그 아이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의 바람은 그런 '아픔' 것과 연관된 것들을 기억하지 말았으면 한다. 나와 연관이 되어 '아픈' 기억을 상기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아이가 누구와도 사귄다는 말도 못 들었다. 괜히 그 영향이 있는 것일까, 생각한다.
'가해자'나 '가해'를 방조한 사람은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지도 못 할 것이다. 당시에 문제를 제기해도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나 학생 자체가 문제가 되어서 '왕따'를 당했을 것이다. 학생은 그런 분위기를 감지한 것이다. 만약 학생이 공론화를 원했다면, 나는 학생편에서 공론화 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피해자'가 고스란히 떠안고 미치도록 아팠다. 그 옆에 있는 나도 '상처'를 입었고 아팠다, 그 '상처'는 지금도 어딘가에 남아 있어서 자극을 받으면 상기되어 시리고 아파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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