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19 처참한 학기말
오늘 동경은 맑고 따뜻한 날씨였다.
어제는 맑았지만 기온은 낮았다. 요즘 거의 학기말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게 다음 주 수업이다. 내가 하는 과목은 시험을 안 한다. 강의 중에 받는 감상문이나, 몇번이나 내는 짧은 리포트로 점수를 준다. 학생들이 공부도 안하면서 시험이라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시험을 그만뒀다. 학생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도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공부가 직업인 사람이라, 그것도 일본에서 아주 엄격한 사람들에게 지도를 받아서 학문적으로 ‘엄격하다’. 보통은 일본에서 학문하는 세계가 엄하냐면, 내가 보기에는 ‘달달하다’. 내 지도교수가 특별히 엄격했고, 내 주위사람들도 나에게 엄격했다. 거기서 살아온 사람이라, 학문에 관해서 그런 태도가 몸에 배었다. 이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일에는 좀 엄격한 편이다. 이런건 성장과정과도 비슷한 것이다.
강의도 학생들이 소화를 다 못할 정도로 내용이 짙다. 이건 결코 좋은 게 아니지만, 나는 대학 강의는 어느 정도 레벨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결코 어려운 말을 쓴다거나, 학생들이 이해를 못하는 데도 혼자서 막 나가는 스타일은 아니다.
내가 엄격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학생들은 풀어준다. 학부학생들은 꼭 공부를 하려고 대학에 다니는 게 아니니까. 가능한 즐겁게 수업을 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 중에는 내 옷차림을 보려고 수업에 나온다는 학생도 있다. 물론 직원 중에도 내 옷차림을 체크하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한가한가 보다… 어제는 니트원피스에 자수로 만든 꽃브로치와 나비 브로치를 했더니 귀엽다고 내 몸을 마구 만졌다. 그것도 몇명이나, 동성이라서 어쩔 수 없지만, 약간 긴장을 한 건 사실이다.
이번 학기에 한국어 기초가 하나 있다. 일본에서는 강의를 하는 사람과 어학을 하는 사람을 구분한다. 나는 원래 강의를 하는 사람인데, 가끔 어학도 한다. 그런데, 학생들이 워낙 공부를 안해서 학기말에 보면 한국어를 읽지도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번에는 그걸 방지하기 위해, 초반에 발음을 하고 나서, 읽기 테스트를 했다. 세상에, 거의 대부분이 아주 좋은 성적을 받았다. 가장 문제가 되는 발음은 된 거다. 그리고 문장으로 넘어갔다. 문법도 조금 했다. 어제는 마지막으로 읽기 테스트를 했다. 벌써 오래전에 윤동주 시집에서 짧은 시를 읽는 걸로 읽기 테스트를 한다고 예고를 했다. 그리고, 시험 전에는 지금까지 배운 것을 소리내서 읽는 걸로 시험에 대비하라고 했다. 학생들이 아주 불안한 표정이다. 나도 고민을 했다. 그래서 윤동주 시집에서 짧은 걸 골라 카피한 것을 그냥 두고 그동안 배웠던 범위에서 한 명씩 읽기 테스트를 했다. 그런데, 반이상 학생이 전혀 못읽는다. 이럴 수가, 아니 그러면 전에 테스트를 해서 확인을 한 건 뭐야? 분명히 다 읽었잖아. 기가 막히다. 정말로 머리가 돌 것 같아서, 머리가 아프다 못해 몸이 뒤틀려온다. 오마이 갓,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내가 뭐 하는 거야.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는 말인가. 그런데, 학생들은 다른 학생이 시험을 보는데 수다를 떠느라고 시끄럽다. 그동안이라도 읽기 연습을 하면 읽을 수 있는데… 아니다. 그리고 내가 예습을 해오라고 한 것도 전혀 안 한 것이다. 물론 예습을 한 학생은 읽을 수 있었다. 시험이 끝나서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읽게 될지 써내라고 했다. 사실 발음에 만 수업 30번에 10번 이상을 했다. 충분히 시간을 배정했고, 한 명씩 서서 읽는 테스트로 확인을 했잖았나. 한글 읽기는 내가 보기에 하려고 하면 한 시간 안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하는 학생들에게는 익숙할 시간이 필요하기에 그렇게 시간을 배정한 것이다.
테스트 결과가 왜 그렇게 나왔는지 이유를 안다. 학생들이 지시를 따르지 않고 그 시간 그 시간을 보낸 거다. 숙제를 할 때도 그냥 빨리 하는 요령으로 해 치운 것이다. 정말로 폭발할 것 같이 화가 난 것은 학생들 의견을 보고 난 다음이었다. 초반에 발음을 할 때 결석을 해서 없었던 학생이 ‘선생님이 가르치는 방식으로는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로 화가 났다. 나는 그 학생에게 처음부터 말을 했다. 너는 가장 중요한 발음을 하는 시기에 없었기 때문에 단위를 받기가 힘들다. 결석 회수도 벌써 위험하다. 학생이 사정 사정 했다. 단위를 못받더라도 수업을 듣게 해 주세요. 그동안 못했던 것은 개인적으로 자습을 해서 따라가겠습니다. 그래서 수강을 허락했던 4학년 학생이다. 그런데, 자습을 해서 될 것 같으면 선생은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학생이 하겠다는데, 그래 단위는 보장을 못하지만 수업을 듣는 건 괜찮다고 했다. 학생이 자습을 하라고 다른 책과 DVD도 따로 챙겨줬다. 열심히 하라고, 시간 중에는 노트도 신경 써서 봤다. 그런데, 마지막에 와서 가르치는 사람을 테러급으로 공격하는 코멘트를 써냈다. 이런 학생은 문제가 있다. 자신이 한 것을 돌아보지 않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다. 또 한 명 4학년 학생이 내 수업은 ‘읽기’ 보다 ‘쓰기’에 중점적이었다고 한다. 아니다. 거의 반을 읽는데 썼다. ‘쓰기’는 글자형태를 익히는 것과 읽기를 연결시키는, 즉 읽고 쓰기가 병행되어야 외울 수가 있어서 시키는 것이다. 쓰지 않으면 외울 수가 없다. 한자를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냥 형태만 외워서 읽는 것과 쓰면서 형태를 익히고 외우는 것은 아주 다르다.
나는 사회인을 상대로 학부 학생 때부터, 돈을 많이 받았던 인기강사였다. 어제는 정말로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싶어서 창문을 열어 봤다. 3층이라, 뛰어내려 봤자, 그냥 어중간하게 다치기나 하지 죽을 것 같지도 않다. 죽을려면 확실히 죽어야지, 괜히 주위를 시끄럽게 만들 필요가 없다. 처참한 기분으로 수업이 끝났다. 다음 수업이 일본문화사 강의였다. 거기에는 내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이 있다. 학생들에게 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아까, 죽고 싶었는데, 수업이 남아있어서 그러지도 못하고 여기 있다. 오늘 강의가 좀 이상해도 이해를 하라고 했다. 어제는 일본의 만화문화에 관한 내용이었다. 학생들이 강의를 들으면서 자지러진다. 내가 만화에 관해 솔직한 감상을 말했기 때문이다. 일본 만화의 표현 형식은 일본문학에 있는 사소설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요즘 인기가 있는 만화가 뭐니? 요새, ‘원피스’가 인기가 있다는데, 나는 그림은 아는데, 읽지는 않았어. 지난번에 일본문학에 관한 강의에서는 내가 쟝르별로 대표적인 작가와 작품에 관해 말을 해도 학생들이 그 작가도 작품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만화는 거의 다 안다.
아이고, 이번은 평화롭게 학기말이 오나 했다. 마지막에 ‘테러급’으로 대폭발을 해서 나를 처참하게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보통 이럴 때는 자학적으로 몸에 나쁜 포테이토칩 같은 걸 먹는다. 어제는 ‘폭탄 테러’를 맞아서 먹을 기력마저도 잃었다. 그래도 동료에게 즉각 하소연을 해서 많이 풀렸다. 즉각, 억울함을 ‘하소연’ 아주 중요하다. 다행인 것은 그 두 학생을 뺀 나머지 학생들이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공부를 안했기 때문에 못 읽었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선생님 힘내세요, 사랑해요’라고도 한다. 완전 병주고 약 주고 갖고 논다. 못살아.
베란다에서 보니 반달이 보인다. ‘낮에 나온 반달’인 모양이다.
뮤즈님 블로그를 보고 내 연필 상자도 열어봤다. 만년필은 잘 안써서 다섯 자루밖에 없다. 잘 쓰는 만년필은 몽블랑, 좋아하는 글씨가 써지는 건, 펜대처럼 생긴 파이로트다. 워낙 수집하는 '병'이 있는 사람이라, 없다고 해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