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29 학기말 결산
오늘 동경은 맑았습니다. 그래도 별로 따뜻하진 않았습니다.
어제로 수업이 다 끝나서 학기말입니다. 채점도 거의 끝나서 입력을 하면 됩니다. 그리고 내년도 수업 시라바스를 입력해야 합니다. 책들도 주문해야 하고… 어젯밤에는 학기 수업이 끝난 기념으로 밤 2시까지 영화를 보고 잤습니다. 오늘 아침에 좀 늦게 일어났는 데, 지진이 있었습니다. 확실히 좀 크게 흔들리더군요.
졸업생이 가까운 데까지 온다고 해서 만나러 갔습니다. 치바에서 차를 타고 오느라고 3시간 이상 걸렸답니다. 역에 갔더니 지진 때문에 열차가 많이 늦어집니다. 서로가 늦다보니 만나서 말을 할 시간이 짧아졌습니다. 졸업생이 작년 일년 힘들어서, 우울증에 걸릴 뻔 했고, 사귀던 남자친구와도 헤어졌답니다. 연수로 한국에도 열흘 정도 다녀왔다고 하더군요. 일년 만에 만났더니 아주 어른스러워졌습니다. 그래서 어른스러워졌다고 했지요. "다른 사람들도 그러는 데요, 그 말은 제가 늙었다는 건 가요?’‘ 만 25살이면 어른이 될 시간도 된거 아냐? 그건 그렇죠. 내가 대학생들 가르치는 말을 하고, 졸업생이 초등학생들 가르치는 말을 하면서 별로 다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오늘 시간이 짧아서 다음에 여유를 가지고 온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카페에서 혼자씩 앉아서 책을 읽고 리포트를 쓰거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겁니다. 요새는 카페를 그렇게 쓰는 사람들도 많은가 봅니다. 저는 전철안이나 전철을 기다리면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채점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백화점에 들러서 안경도수가 안맞는 걸 교환했습니다. 그 걸 기다리는 사이에도 채점을 했지요. 그리고 가게에 들러서 빵을 받아서 왔지요. 지난 주 거기서 산 니트를 리폼한 것도 보여줬고요. 집에 와서 빨래하고 고구마도 쪄서 아침겸 점심을 먹었지요. 영화를 보면서 채점한 걸 집계헸습니다. 지금은 별 다른 감정이 없이 집계를 합니다. 그 전에는 제대로 안하는 학생을 보고 화가 나고 갈등을 하기도 했지요. 그래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는데, 여기까지 오는 데 15년 걸리더군요.
저녁 때는 취직활동하는 학생이 이력서와 회사에서 요구하는 리포트를 써서 봐달라고 가져왔습니다. 추워서 나가기 싫지만, 나가야지요 어쩝니까? 학생이 너무 뭘 몰라서 지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문자를 보내면 빨리 답신을 보내라고, 늦으면 왜 늦었는지, 설명하라고 했지요. 문자를 씹지 말라고 했더니, 그 걸 몰랐답니다. 이틀 전에 2시간에 걸쳐서 이력서와 레포트를 철저히 고쳤습니다. 오늘은 그 것도 말을 했지요. 보통 그럴 경우, ‘오늘은 귀중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문자를 보내는 거라고, 설사 고맙다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사회인으로서 예의라고 했지요. ‘유학생들도 연락 잘해, 근데 너희들은 친구들 사이에도 그렇지 않아?’ ’예, 커플들 사이에서만.’ ‘커플이 아니고 사회인으로서 필요한 거야.’ 아니 ’커플’이라니요, 내가 뭐 이 추운 날 취직활동하는 학생 붙잡고 성희롱 합니까? 걔가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고 말더군요. 아이고 학생 가르치기 힘듭니다. 그래도 그 것 빼놓고 제가 하라고 한 건 다해서 왔더군요. 나중에 내가 미친건 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학생이 그말을 하면 제가 성희롱 할 뻔한 사람이 된다는 문맥을 전혀 파악조차 못 한다는 겁니다. 일본 아이지만, 일본어 독해력이 아주 약해서요. 연락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그게 중요하다는 걸 가르치려고 했더니, 정말로 큰일이 날 뻔 했습니다. 요즘 아이들 중에는 이렇게 기가 막히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저를 믿고 따릅니다. 그냥 내 마음만 답답하고 복잡하지요.
학기말 마지막 수업이 가까워오면, 학생들이 제 수업에 대한 감상을 씁니다. 보통 제 수업이 대학 수업 중 제일 재미있었다는, 흥미롭다는 게 많습니다. 저는 우수한 학생들보다 개성적인 학생들에게 신경을 씁니다. 그 중에는 ‘화학반응’이 일어나 뭔가에 눈을 뜨는 케이스도 종종 있어서 다른 선생들이 부러워합니다.
‘저는 처음에 선생님을 보고, 아! 싫어하는 타입이라고 생각했지요. 죄송합니다. 강의를 계속 듣다보니 제가 지금까지 본 어느 선생님보다도 저를 제대로 봐주시는 분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선생님 강의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제 마음에 남는 선생님 강의 감사합니다.’
예, 물론 저는 그 학생을 특별히 신경 쓴 것도 아니고요, 구원 같은 걸 어떻게 합니까. 어쩌다가 학생이 그렇게 느낀거지요. 선생을 신뢰하는 학생은 전혀 성적에 신경을 안씁니다.
또 한명, ‘저는 지금까지 어떤 강의를 들어도 자신의 생각을 말로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었읍니다. 그저 ‘위선적인, 그럴듯한’ 한마디 밖에 못 썼지요. 그런데 선생님이 강의에서 뭔가를 느끼라는 말에서, 저는 3학년인데도 처음으로 대학강의 듣는 법을 알았습니다. 항상 학기말이 되면 제 마음은 단위를 딸 수 있나 걱정되어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강의를 통해서 단위를 따기 위해 듣는 강의가 아닌, 자신을 위해 강의를 듣고 뭔가를 느끼는 걸 배웠습니다. 강의를 듣는 게 지금은 전혀 다릅니다. 선생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학생들이 ‘위선적인, 그럴듯한’ 말을 쓰는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다른 선생님 걸 봤지요. 정말로 한 줄이나 두 줄정도 썼더군요. 제 수업을 듣는 아이들은 할 말이 넘쳐나서 뒷장까지 씁니다. 그런 걸 통해서 저와 대화를 하는 걸 압니다. 제가 꼭 읽고 있는 것도, 그래서 학생들 중에는 내가 자기를 이해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도 많지요. 학생들이 하고 싶은 말을 시키면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게 아주 재미있습니다, 일본 아이들은 ‘지식’보다 선생과 마음을 소통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강의를 통해서 학생들 마음의 문을 여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강의가 먹히거든요. 저는 마음의 문을 여는 문고리가 어디 있는지 아직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게 점점 시간이 걸린다는 거지요. 15년 전에는 첫시간 5분 이내에 승부가 났지요. 늦어도 첫시간에 학생들은 이사람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참고 앉아 있을까를 정했지요. 지금은 그 단계까지 오는 게, 거의 학기말이 되거든요.
겨우 학생들 마음이 열려서 강의가 먹히겠다 싶으면 학기말입니다.
선생이라는 직업이 학생들 때문에 울고 웃고, 아이고 참 복잡합니다. 항상 짝사랑을 하는 것 같아요. 언제나 밑지는 장사여서 억울하고 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