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30 다가오는 학기말
오늘 동경 날씨가 아주 무더웠다.
어느새 몇 주만 있으면 학기말이다. 지금은 서서히 학기말을 향해서 가고 있다. 칠월이 오면 학기말은 금방 다가온다. 학기말이 되면 정신이 없으니까, 좋은 학기말을 맞기 위해 준비를 해야지.
그런데, 학기말이 오기도 전에 갑자기 기적처럼 학습목표를 도달하는 경우도 있다. 그 목표라는 것은 강의 내용에 적혀있는 게 아니다.
지난 목요일에 여성학 강의가 있었다.
그 날 강의내용은 ‘父子世帶와 사회복지’에 관한 것이었다. 일본에서 기본적인 복지문제에서는 父子世帶 보다 母子世帶가 중심이다. 父子世帶는 母子世帶의 5분의 1에서 6분의 1 정도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대는 둘 다 부모 중 한쪽과 미혼인 성인이 안된 자녀로 구성된 세대를 일컫는다. 그 대부분이 ‘이혼’으로 인한 것이다. 이혼 할 경우 대부분이 여자 쪽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추세였다. 그렇다 보니 싱글맘과 그 자녀가 사회복지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남녀의 취로 상태가 다르다는 이유가 있다. 대상자 중에서 여자가 약 4할 정도가 파트타임으로 일을 한다. 남자인 경우는 약 1할 정도만 파트타임으로 일을 한다. 남자들은 대부분이 정규직으로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남자들이 아이들을 양육하기는 더 힘들다는 점도 있다. 경제적으로 보면 평균적으로 남자 쪽이 여자 수입 두 배 정도가 된다. 그래도 부부가 있는 세대 보다 3분의 1 정도 적다. 父子世帶의 경우 경제적으로는 母子世帶 보다 덜 힘들지만, 정규직으로 일하는 아버지들이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조부모와 동거를 하지 않는 경우 자녀양육을 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 자녀를 자신이 양육할 수가 없어서 양호시설에 맡기는 경우도 있다. 사회복지나 교육제도도 父子世帶와 적합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父子世帶를 생각하지 않고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남녀 성역활 분담 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사는 근처에 보육원과 유치원이 있다. 아침마다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보육원과 유치원에 간다. 엄마들은 아이들을 보육원이나 유치원에 맡기고 나서 그 앞에 모여서 수다를 떤다. 그러면서 필요한 정보들을 교환한다. 몇 년을 봐도 아빠가 아이를 데리고 가는 건 본 적이 없다. 설사 아빠가 있더라도 엄마들의 수다에 참가를 못할 것이다. 일본도 남녀가 유별하다. 한국과는 다른 남녀유별인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찜질방에 남자와 여자, 가족들이 같이 뒹굴지만 일본에서는 상상을 못 한다. 그리고 일본에서 남자들이 무뚝뚝하고 과묵한 것을 좋게 여긴다. 남편들이 집에 돌아와서 ‘밥, 목욕, 잔다’는 세 마디면 끝난다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표현도 가능하다. 물론 젊은 세대들은 덜 과묵하고 무뚝뚝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현저히 발달했다는 소식은 아직 못 들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보면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오히려 저하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주위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일본 아빠들이 자녀나 부인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못한 경향이 있다. 즉 일본에서 싱글파파가 아이를 양육하는 데는 여러모로 힘들다는 것이다. 같은 사정을 알아서 의논을 할 상대도 없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 중에서도 가정이 ‘별거’나 ‘이혼’ 한 경우가 있다. 왠지 대부분 학생들은 그 내용을 묻지도 않는데 세세하게 써서 알려준다. 남학생이 아빠가 별거를 하고 있는데 이혼에 응해주지 않아서 골치가 아프다는 등, 한 여학생은 아빠와 엄마가 별거를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엄마는 매일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아빠 도시락을 만든다, 왜 아빠 도시락을 만드는지 이해가 안 된다면서 그래도 아빠는 양육비를 줘서 고맙다는 등 사정도 집집마다 다르다. 나는 그동안 ‘별거’나 ‘이혼’한 가정의 학생들을 보면, 다른 학생들보다 철이 들었다고 할까, 어른스럽게 보인다. 그리고 같이 사는 엄마나 아빠를 단지 엄마나 아빠로서 만이 아닌 인간으로서 좀 더 이해하려 한다.
지난 강의에서 이혼을 결혼생활을 계속 유지할 수 없는 경우 해결책으로서 택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했다. 이혼을 했다거나 父子世帶, 母子世帶라서 불행한 것도, 불쌍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조금 다르다고 해서 불행하다든지, 불쌍하게 보지 말라고 했다. 강의가 끝나서 학생들이 감상을 써서 냈다.
학생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주위에 있는 친구들을 주의 깊게 봐 온 모양이다. 양부모가 있어서 꼭 행복한 것도 아닌 것처럼, 한쪽 부모만 있다고 해서 불행한 것도 아니라고, 자기 형제 중에도 싱글맘도 있고 싱글파파도 있지만, 힘든 점이 있어도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부모가 별거 중인 학생은 아무래도 혼자서 생각하고 결정할 시간이 있어서 다른 아이들보다 철이 빨리 들어 자립심이 생긴다고도 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만 배우는 게 아니라 밖에서도 배우는게 많다고, 또 어른들 만이 아이를 가르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학생들이 따뜻한 눈으로 주위에 있는 이혼한 가정의 친구들을 보는 것이었다. 이해 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조금 다르다는 게 편견이나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었다. 지금도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은 이지메 대상이다. 그야말로 ‘감동의 쓰나미’였다. 학생들이 마음을 열고 조금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희망’이 있구나. 설사 세상이 팍팍해서 달리는 전철에 투신자살을 하는 사고가 일상적이라 해도 아직 ‘사랑’이 남아있다는 걸 학생들이 가르쳐 주었다. 아직도 철이 없는 나는 그 감상문을 읽으면서 역에서 선채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학기말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그 과목은 학습목표를 훨씬 넘어서 다른 세계로 갔다.
고맙다, 사랑이 있는 학생들아! 너희들이 지닌 사랑이 희망이야.